돌과 탑, 나무 마히토부터 왜가리, 큰할아버지, 히미, 마츠코, 와라와라, 키리코 모든 소재와 인물들은 뚜렷한 의미와 기능이 있고, 시대적 배경도 메이지 유신부터 태평양 전쟁까지로 특정되어 있다. 그렇게 전달되는 메시지는 참 감동적이고, 역사적 배경, 개인적 삶, 이전 작품에 대한 레퍼런스 등 켜켜이 쌓인 의미의 총체는 알면 알수록 흥미롭다.
하지만 내가 바란 건 인물 간의 관계와 그로부터 오는 감동에 더불어 알수록 깊이 있는 메시지였을 텐데, 메시지를 드러내느라 인물은 도구화되었고 감정은 메말라버렸다. 난해한 척 직설적인 이 서사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인생과 세상 관한 은유로서 뛰어날지 몰라도, 한 편의 영화로서는 참 아쉬울 따름이다. 특히나 주인공 마히토는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시종일관 침착하고 의연하다. 선택받은 아이로서 결코 죽지 않을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 관객으로서는 주인공에 감정을 이입하기가 어렵다. 분명 판타지 어드벤처가 상영되는 중인데 긴장감이 조성되지 않으니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또 gv 등으로 영화 외적인 해석의 요소를 접하거나, 그런 요소들을 스스로 깨닫지 않고서는 내재적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내용이 수두룩하다. 개연성이 결여된 까닭에 애니메이션 자체로 두고 재미있게 감상하긴 어렵다.
다만,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만큼 하시고 싶은 말씀이 참 많았을 터이다. 사실 그 많은 이야기를 이렇게 조밀하게 구성해 낸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은 틀림없다.
※스포주의 ---- 그런데 곱씹을수록 단 맛이 진하게 느껴진다. 하나의 신화로 두고 본다면, 관객 한 명 한 명이 돌탑 안의 세계를 통해 세상과 인생을 깨달아가는 경험이라고 두고 본다면 생각할 거리가 적지 않다.
너는 이 황폐한 세상, 모순적인 사람들과 무엇이 다른가? 세상의 질서를 세우라는 제안을 받더라도 그 재료가 악의로 물들었다는 이유로 거절하겠다는 꿈을 꾼 것은, 세상에 대한 환멸과 증오로 가득 찬 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온갖 수난과 역경을 겪으며 깨닫는다. 마츠코로부터 자신만 상처받는 것이 아니며 마츠코 역시 자신의 냉랭한 태도로 인해 상처받고 있음을. 잔인하고 난폭해 보이던 펠리컨들도 실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것임을. 거짓말을 일삼는 사악한 왜가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음을.
문제는 외적인 세상과 그 세상을 이루는 돌(객체)의 악의가 아닌, 자신 내면(주체)에서 샘솟는 악의다. 마히토는 나는 선한데 세상이 나를 '억까'한다는 착각을 벗어나, 나도 결국 그 부조리한 세상을 이루는 일부임을 깨닫는다. 마히토가 마츠코로 하여금 타인에 대한 너그러움과 우정이 남아 있는 바깥세상에서 아이를 낳게 하는 것도 그래서다.
<오펜하이머>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재능과 대의를 믿고 '돌'을 활용하여 인류사상 최악의 무기를 만들어냈다. 마히토 역시 돌을 집어 세워보겠다는 마음을 먹고 오펜하이머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세상 아무도 그 '돌'을, 그 돌을 토대 삼아 질서가 잡힌 이 세상을 탓하지 않는다. 대신 오펜하이머는 그의 속내와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추궁당하는 고통을 견뎌야 했다.
한편 환상적인 세상에서 모험을 마치고 돌아와 주체적이고 너그러운 사람으로 발돋움한다는 서사는 정확히 1년 전 큰 반향을 일으켰던 <에.에.올.>과 유사하다. 다만 인생의 허무에 빠져 세상을 파괴하는 악당이 있는 에.에.올.의 멀티버스 속 세계와 달리, 힘과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착취하는 폭력의 세계는 분명 우리가 겪어야 했던 현실이었다.
마히토는 탑에서 빠져나오며 땅에 떨어져 있던, 별 볼 일 없는 돌 하나를 들고 나왔다. 들고 나온 게 겨우 가치 없는 그 돌멩이 하나냐는 핀잔도 듣는다. 그렇지만 돌은 악의가 없고, 선의도 없다. 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