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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피사 여행: 늦게 핀 꽃, 갈릴레오 갈릴레이

Recharge 12일 차: 피렌체 > 피사 > 피렌체

by Chuchu Pie

12일 차 하이라이트

이번 여행의 두 번째 당일 코스는 바로 피사(Pisa)이다. 두말할 것 없이 피사의 사탑으로 유명한 도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고향이기도 하다.


바로 전 날 베네치아를 다녀오며 준비 부족이 얼마나 여행의 질을 떨어뜨리는지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피사 여행을 앞두고는 열심히 공부 하기로 했다. 그래 봤자 이것도 결국 당일 치기 공부이지만. 그렇게 피사에 관해 이런저런 자료를 뒤적거리다 보니 그 모든 것들을 관통하는 딱 한 가지가 눈에 띄었다.


바로, 갈릴레오 갈릴레이다.

galileo-e1435358932718.jpg 뭔가 짜증 나는 듯한 표정의 이 아저씨, 실제로도 호전적이고 권위주의를 싫어하며 논쟁을 좋아하는 두뇌 파이터였다고 한다.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지동설을 주장하며 투옥되었던 지식과 과학의 순교자로만 어렴풋이 알고 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 조금 더 찾아보니, 내가 그리던 이미지와는 다른 점이 너무 많았다.


소년 가장 갈릴레오 갈릴레이

원래는 귀족 집안이었지만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는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를 배경으로 1564년에 태어났다. 돈이 없어 대학도 중퇴했고, 경제적 이유로 의사가 되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치고 가장 가난한 길인 수학자로서 살았다. 주 수입은 과외. 그러나 20대 후반에 아버지를 여의고 장남으로서 가족을 부양할 책임을 일찍 떠안게 되면서 더더욱 힘들어졌다. 하지만 여동생들이 결혼해서 출가할 때는 그나마 힘들게 모아둔 월급을 탈탈 털어 혼수까지 해 준, 멋진 오빠이자 책임감 있는 소년 가장이었다.


늦게 핀 꽃

그랬던 그가 마침내 기회를 잡은 건 그의 나이 만 45세일 때이다. 1609년, 네덜란드의 한 상인이 베네치아에서 망원경이란 걸 선보였다는 편지를 받은 갈릴레이는 자신의 수학적 천재성을 이용해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망원경을 개발해낸다. 렌즈 3개를 겹치고, 8개를 겹치고, 이윽고 20개를 겹친 획기적인 제품을 만들어낸 것. 그러기 위해 렌즈 깎는 법까지 스스로 터득했다고 하니, 가히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기회를 열심히 노력해서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바다 위 함선에서 군사적 목적으로 쓸 심산이었지만 (그렇게 팔아도 엄청난 돈이 됐을 것이다), 갈릴레이의 망원경은 하늘을 향했다. 그리고 발견한 것이 목성의 위성. 다른 행성에도 위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천체는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기존 관념을 더욱 확실하게 부정하고 코페루니쿠스 체계를 강력하게 지원하게 된다. 이를 기술한 책이 시데리우스 눈치우스 (Sidereus Nuncius)라는 책인데 이탈리어로 쉽게 쓰여 대중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이른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것이다.

Galileo_sidereus.jpg 갈릴레이의 책, Sidereus Nuncius. 그림까지 상세하기 덧붙여 뭔가 읽기 쉬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미지 및 내용 출처: Universe Today)


처세술의 달인

이에 멈추지 않고 그는, 발견한 네 개의 위성의 이름을 당대 가장 막강한 부와 영향력을 과시했던 메디치 가문의 이름을 따 메디치의 별 (Medicean stars)라고 명명했다. 배고픈 과외 선생님 시절 가르쳤던 피렌체의 코시모 데 메디치와 그 형제들과의 인연을 발전시킨 것이다. 이를 계기로 그는 메디치 가문의 수석 수학자이자 철학자라는 지위를 얻게 되고, 마침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 엄청난 부와 사회적 지위를 거머쥐게 된다.


그가 처세술의 달인임을 보여주는 일화는 또 있다. 종교 개혁의 여파로 민감해진 교황청이 갈릴레이에게 "어이, 지동설 설파 좀 그만해"라고 하자 주저 없이 "네"라고 한 것이다. 훗날 종교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도 자비를 청하는 아주 낮은 자세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렇게 때문에 재판장을 나가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외쳤다던 모습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도 한다. (출처: 나무 위키)


두뇌 파이터

피사의 사탑이 기울어져 있어 갈릴레이가 "무거운 물체는 가벼운 물체보다 빨리 떨어진다"는 고정관념을 깨기 위한 실험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실험이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증거는 없단다. 그럼 피사의 사탑은 왜 기울어져 있는가! 그냥 약한 지반 때문이라고 한다. 12세기에 착공했을 때부터 문제였다고 한다. 3층쯤 올렸을 때 눈치챘단다. 누군지 모르지만 공사 책임자의 간담이 서늘했을 것이 상상된다.


실제로 갈릴레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을 부정한 것은 단순 사고 실험이었다. 그 논리가 아주 명쾌하다:


무거운 게 가벼운 것보다 빨리 떨어진다고 하자. 그 가벼운 물체와 무거운 물체를 묶어서 떨어뜨리면, 가벼운 물체는 천천히 떨어지려 하고 무거운 물체는 빨리 떨어지려고 하니 전체적으로 속도가 줄겠지.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 개를 묶어 더 무거운 물체가 되었으니 사실은 더 빨리 떨어져야 맞겠지. 이처럼 하나의 가설에서 상반되는 두 개의 결론을 얻을 수 있으니 가설이 틀린 거야.


백 분 토론에 나올 수 있었다면 무적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 그의 책, 드 모투(De Motu, 영어로는 On Motion이란다)에서도 아마 이런 말투였을 것이다. 여러 해에 걸친 글을 모아둔 이 책은 뒤로 갈수록 스타일이 변해, 갈릴레이의 논리를 강하게 옹호하는 한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대화 형식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이 모든 갈릴레이 이야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그가 늦게 핀 꽃이라는 것이다. 근 80년 인생 중 반 이상은 인정도 못 받는 배고픈 수학자에 불구했고, 45세에 찾아온 기회를 잡아 40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꽃피기 시작한 전형적인 대기만성형 인재였다. 위에 설명한 사고 실험도 배고픈 시절에 쓴 글이었고 그가 죽은 후에야 책으로 출판되었다.


문득 여행 전에 가장 큰 (부끄러운) 고민을 담아 쓴 '승진하고 싶다'가 생각났다.


뉴욕의 시간이 캘리포니아보다 3시간 빠르다고 해서 캘리포니아가 느린 것은 아니듯. 오바마는 55세에 은퇴했고 트럼프는 70세에 시작했듯.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시간대에서 일한다, 는 말이 와 닿는다. 그러고 보면 유비가 제갈량을 만나 삼고초려했던 것도 그의 나이 45세 무렵이다. 세상에 알려진 유비의 업적 대부분은 그의 인생 불과 삼분의 일도 안 된 시간에 걸쳐 이뤄낸 것이다. 그러니까 100세 시대인 지금은 70세에 시작해도 된다는... 그러니까 이를테면 그렇단 말이다. (본문 중에서)


이제 여기에 갈릴레오 갈릴레이 아저씨도 추가다.




12일 차 여행 일지

아침

아침에 일어나 숙소에서 베키오 다리 (Ponte Vecchio)까지 왕복 약 2.5km를 뛰었다. 상점들이 문을 닫은 베키오 다리가 오후에 북적대는 베키오 다리보다 훨씬 더 고즈넉하고 멋있었다. 베키오 다리의 진가를 느끼려면 꼭 아침 일찍에도 한 번 가 보기를 추천한다. 이왕이면 조깅으로 뛰어가는 게 건강적으로다가 뿌듯하기도 하고 일석이조일 것이다. (급하게 쓰다 보니 음주 말투가 튀어나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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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피렌체에서 피사까지는 기차로 약 한 시간이면 간다. 로컬 기차이기 때문에 2-30분 간격으로 자주 있다. 우리가 갔을 때 막 한 기차가 출발하려고 해 뛰어올라탔다. 기다림 없이 탑승했다는 기쁨도 잠시, 기차가 꽉 차서 꼼짝없이 서서 가게 되었다. 게다가 33도의 푹푹 찌는 날씨에 어떤 기차 칸은 에어컨이 없어, 지옥철이 따로 없었다. 결국 혹시 모를 빈자리와 시원한 에어컨을 찾아 몇 칸을 움직인 뒤에야 (결국 서서) 자리를 잡았다.


약 30분 지나자 한 인도 친구가 우리 애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주겠다고 일어났는데, 애들이 거절해버렸다. 애들이 거절해 버리니 나로서도 어쩔 수가... 그 인도 친구의 옆을 보니 여자 친구인 듯한 아리따운 여성이 앉아 있었는데, 여자 친구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줄 기회를 우리가 날려버린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조금 들었다.


도착을 약 3분 앞두고는 우리 옆에 있던 한 아주머니가 자리를 양보해주셨는데 이건 좀... 피사가 종착역이란 말이다. 감사하지만 우리도 내려요,라고 그냥 말씀드렸다. 우리도 내리고 아줌마도 내리고 여기 있는 사람 다 내려요,라고는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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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아코디언을 들고 노래하는 사람이 들어 왔지만 아무도 호응을 안 해줬다. 그러기엔 너무 더웠다.


피사 역에 내려 1유로짜리 버스를 타고 갈까 망설이다가 결국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덥긴 했지만 돈을 바꾸기도 귀찮고, 버스에 소매치기가 많다는 사실이 떠올라 그냥 쉬엄쉬엄 걷기로 의견 일치를 봤다.


사실 거리도 2km 내로 그리 멀지 않다. 열심히 걸어가면 20분이면 가고, 이곳저곳 둘러보다 가면 조금 더 걸릴 수도 있다. 우리는 쇼핑몰을 가로질러가기로 했는데, 중간에 책도 사고 화장실도 가고 음료수도 먹고 그러다 보니 약 두 시간이 걸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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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9_115046.jpg 쇼핑의 거리, Corso Italia. 각종 음식점, 명품, 평범한 브랜드 가게가 가득해 보는 재미가 있다.
20190719_122524.jpg 우리는 한 서점에 들어갔는데 서점 안 쪽 뒤뜰이 이렇게 멋있다. 나무로 그늘을 만들어 책을 진열해 놓았다.
20190719_123111.jpg 영어 책 섹션이 따로 있어 각자 한 권씩 구매했다. 첫째는 Twilight, 둘째는 반지의 제왕.
20190719_123235.jpg 서점 뒤뜰에서 하늘을 바라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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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에서부터 흘러온 아르노 강을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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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가게가 맞나 싶은 골동품 가게를 비집고 들어가니, 지금 팔고 있는게 맞나 싶을 정도의 낡은 책가지며 시계가 눈에 띈다. 너무 더워 바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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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뒷골목을 몇 번씩 돌고 이름 모를 광장을 지나고 나니, 드디어 피사의 사탑이 멀리서 모습을 드러낸다.


점심

피사의 사탑에서 가장 볼 만한 것이 사진 찍는 사람들이라더니 정말 맞는 말이다. 허공에 대고 팔을 뻗거나 다리를 들고 혀를 내밀고 엉덩이를 대는 등 기괴한 동작을 취한 사람들이 가득했다. 무안하기도 해서 우리는 그냥 평범하게 찍었는데, 좀 더 과감하고 창의적으로 해 볼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pisatower11.jpg 이런 식이다

(이미지 출처: Bored B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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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우리끼리 낄낄대며 찍었지만, 나중에 보니 너무 평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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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들의 사진들.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피사의 사탑을 보고 두오모 대성당 (Piazza del Duomo)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더운 날씨에 아이들은 이미 관광 의욕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그늘에 앉아 쉬었다. 피사의 사탑을 오를 수도 있었지만, 대기 시간도 두 시간이 넘게 남았고, 아래에서 위를 보니 자유 낙하 실험처럼 탑이 기울어진 쪽으로 몸을 내밀어 아래를 볼 수 있는 것 같지도 않아 여우의 신포도처럼 그냥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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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9_135926.jpg 피사의 사탑과 대성당 및 광장을 한 번에 담았다. 정말 화창한 날씨였다.


오후

돌아올 땐 더 짧은 경로인 via Santa Maria라는 길로 걸었다. 음식점들이 즐비하고 마차가 지나다니는 길이다. 늦은 점심시간이었기 때문에 많은 가게들이 곧 문을 닫았는데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음식점 중에 가장 평가가 괜찮았던 Bar & Food 62라는 곳으로 갔다. 음식은 (또 파스타!) 무난했고, 파르페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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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9_154148.jpg 무더운 날씨였지만 아이들이 낄낄대며 노는 바람에 즐겁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피렌체로 돌아와 샤워를 하기 위해 호텔에 도착하니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인형들을 정리해 놓은 센스가 보통이 아니다. 마지막 밤이었기 때문에 과자 선물과 손편지까지! 알고 보니 이렇게 귀여운 면모로 평판이 괜찮은 호텔이었다. 역에서도 가깝고, 손님의 이름까지 외우는 등 서비스가 아주 훌륭하다. 아침으로 나오는 Pastry 역시 일품이다. 이름은 Hotel Globus. 피렌체를 방문할 경우,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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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샤워를 마치고 피렌체 구경을 나섰다. 낮에는 굉장히 덥지만 저녁에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선선하게 걸어 돌아다니기에 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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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첫째와 함께 아이쇼핑을 즐기는 동안 나는 둘째와 함께 길거리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하는 음악을 감상했다. 약 30분을 듣던 둘째가 돈을 주고 싶단다. 지갑을 보니 5유로짜리 두 개가 있다. 5유로 적선하느니 10유로 내고 CD를 집어 오라고 했다. 그렇게 큰 맘먹고 갔는데, 이 언니가 음악에 너무 심취해서 둘째가 막상 돈을 주고 CD를 집어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돌아가서 '어, 왜 CD가 하나 비지?"하고 놀라지 않기를.


구매한 CD를 보니 Roxana Visinescu라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관련 자료가 많이 없는 걸 보니 아직 무명인 것 같은데, 구글로 찾아보니 2010년에 발레리아 마르티나(?)라는 국제 콩쿠르에서 한국의 피아니스트 이영진이라는 분과 함께 공동 우승을 한 사진이 눈에 띄었다. 실제로도 사진으로도 웃는 인상이 아주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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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Massafra Today)


저녁은 어제 크게 감동했던 호텔 앞 중국 음식점인 Impressione Chongqing에 또 가기로 했다. 정말 해외여행 중에 느낀 매운맛의 유혹은 뿌리치기가 어렵다. 가장 맛있었던 생선 수프는 기본으로 하고 이번에는 마파두부를 시켜봤다. 결과는 대성공. 그렇게 피렌체에서의 마지막 밤도 '뜨겁게'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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