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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chu Pie May 27. 2019

승진하고 싶다.

그런데 잘 안 된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커다란 보름달이 떠 있을 때, 혹은 주머니에 돌아다니는 동전을 분수대에 던질 때 마음속으로 읊는 소원을 보면, 당시의 가장 큰 염원 혹은 고민에 대해 알 수 있다.

승진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얼마 전 등산길에 멋진 폭포가 있길래, 조약돌 하나 주워 던지면서 (나도 모르게) 읊조린 말이다.  그리고선 누가 들었을까 총총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나이 사십 넘어 가장 원하는 게 승진 따위라니.  어지러운 세상을 구할 힘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하물며 가족의 건강이라도 빌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마치 요술램프의 소원 세 개 중에 하나를 '이번 신호등에 안 걸리게 해 주세요' 따위에 낭비하고 만 기분이 들었다.  둘째가 때마침 감기에 걸려 기침을 해댔고, 내가 소원을 쓸데없이 낭비해서 그랬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했다.


조바심이 생겼다.

지금 회사에 들어와 일한 지 딱! 만 5년이 됐다.  그리고 그 사이에 승진을 한 번 했다.  만 2년일 때 한 번 했으니 그 후 3년 동안 무소식이었다고 보면 된다.  첫 승진 때만 하더라도 거칠 게 없을 것 같았지만, 알고 보니 그게 전성기였을 줄이야.  


이후 여러 사정이 생겨 정치에도 패배하고, 새로운 보스를 모시게 되고, 그의 눈 밖에 나게 되고, 팀을 옮기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나와 비슷한 레벨에 있던 다른 동료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승진들을 했다.  어떤 이들은 초고속으로 여러 단계를 오르기도 했다.  엄청 기쁘게 축하해줬지만 속으로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동료를 회사 인트라넷에서 찾아보기도 하고, 아직 승진하지 못한 걸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 숨을 쉬기도 했다.  그리고 이내 지질한 나의 모습에 실망해 한 번 더 한 숨을 쉰다. 


뭐가 문제일지 여러 가지 생각해봤다.  새로운 보스의 밑에서 1년 넘게 헤맨 것을 자책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나왔어야 했는데!라고 생각해봤자 얻을 것은 없다.  "빨리 나왔어야 한다"는 생각은 훗날을 위한 교훈이 될 수 없다.  보스들에게 "나는 승진을 원한다"라고 직접적으로 요구한 적이 없는 나의 어리석음을 탓하기도 했다.  이건 훗날을 위한 교훈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의 보스에게 직접적으로 요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메일을 여러 번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고, 1:1 미팅을 할 때 "저기, 할 말이 있는데..."라고 해 놓고선 팀의 미래가 어쩌고,라고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연애할 때도 이 정도로 망설인 적이 없다.  사업을 할 때는 여기저기 투자와 계약을 잘도 요구하고 다녔는데.  이상하게 '숭진'이라는 그 한 마디만은 입에 좀처럼 담아지지가 않는 내 혀의 크립토나이트이다.  (심지어는 손가락도 그 단어를 껄끄러워해서 방금 오타를 내지 않았는가!)


당연하지만, 남과 비교해서 그렇다.  병인 것 같다.

사실 약 1년 전 '이 산이 그 산이 아님을 깨닫고' 하산할 때 이미 각오했던 일이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이렇게 조바심을 내면 안 된다.  "이 산이 아니라고 깨닫는 순간 계속 오르는 것은 도전이 아니라 관성일 뿐"이라고 호기롭게 말해놓고선 이제 와 그 관성을 그리워해선 안 된다.  


결국, 지난 1년 간 없던 조바심이 생긴 이유는 스스로를 남과 비교하기 시작했기 때문인 것 같다.  돌이켜보니, 우연히 알게 된 한 동료의 엄청난 승진 소식이 기폭제가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곧이어, 사업하는 한 친구가 회사를 매각해 큰돈을 번 경사가 '터진' 것이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이 친구는 바로 요트부터 샀다.  내가 항상 강조하던 '사회적 미션과 가치'는 쥐뿔.  솔직히 부러웠다.  갑자기, 나는 대체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파워포인트의 슬라이드 몇 장을 고치기 위해 두세 시간 씩 쓰다 보면 자괴감에 화가 났다. 


다들 각자의 시간대로 각자의 페이스에 맞춰 살아갈 뿐인데.  남들의 페이스와 비교해 조바심내고 우쭐해했던 자신이 갑자기 부끄럽다.  그토록 엎어지고 헤매던 스타트업 시절에도 안 하던 남과의 비교 짓을 이제야 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서로 직접 비교 자체가 불가한 스타트업 정글과 달리, 한 두 가지의 잣대로 상대평가가 어느 정도 가능한 큰 기업에 근무하면서 생기는 일종의 병인 것 같다.   


나만의 시간대에서 산다.

뉴욕의 시간이 캘리포니아보다 3시간 빠르다고 해서 캘리포니아가 느린 것은 아니듯.  오바마는 55세에 은퇴했고 트럼프는 70세에 시작했듯.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시간대에서 일한다, 는 말이 와 닿는다.  그러고 보면 유비가 제갈량을 만나 삼고초려했던 것도 그의 나이 45세 무렵이다.  세상에 알려진 유비의 업적 대부분은 그의 인생 불과 삼분의 일도 안 된 시간에 걸쳐 이뤄낸 것이다.  그러니까 100세 시대인 지금은 70세에 시작해도 된다는... 그러니까 이를테면 그렇단 말이다.

임정욱 센터장님 블로그를 통해 접하게 된 글. 중고신인 이민자로 사는 나에게 큰 힘이 된다.

(Image source  - 에스티마의 인터넷 이야기)


반성하고 다시 나만의 시간대로 돌아와야겠다.  나만의 시간대로 돌아와 나만의 페이스로 나만의 목표를 정해놓고 하루하루에 초점을 맞추는 거다.  그러면 그렇게 원하던 승진도 결국에는 될 것이고 언젠가는 더 큰 일을 하게 될 기회가 생길 것이다.  건강을 관리해야 하는 이유다.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물론 지금 보스에게는 툭 까놓고 요구할 것이다.  회사가 10배 커지는 동안 너무 얌전하게 살다가 밥그릇을 많이 놓쳤다.)  


언제 기회가 되면 다시 그 폭포로 돌아가 조약돌을 던져야겠다.  두 개 던질 테다.  하나는 당연히 가족의 건강이고 또 하나는...


비밀이다.  


소원인데.  


당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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