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를 해봐. 억지로 말하려고 하지 말고.
정말 복잡한 일도 어쩔 땐, 단 한 마디로 마법처럼 정리될 때가 있다.
얼마 전 아는 후배가 저녁에 술 한 잔 하자고 불러냈다. 후배는 덩치가 0.1톤에 육박하고 목소리도 쩌렁쩌렁하다. 술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사랑하는 상남자다. 워낙 친화력이 좋아, 알게 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첫 만남부터 스스럼없이 친해졌다. 그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면 왠지 모르게 사회 초년병 시절이 떠오른다. 하루 종일 쌓인 욕지거리를 소주잔에 털어놓고 그걸 다시 입 안으로 털어 넣는, 그런 뭔가 속 시원한 술자리. 그래서 그 후배가 번개를 치면 설렌다.
그 날은 후배 외에 여러 명 더 있었다. 그중 몇 명은 초면이었다. 하지만 어색했던 분위기는 소주 원 샷 몇 번에 안개 걷히듯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누구누구님이었던 사람들이 갑자기 얼굴 벌건 형님 동생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 후배가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 형님들 저 이혼할 것 같아요"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지만, 가만히 보니 빈 말이 아닌 것 같았다. 사람을 좋아해 항상 밖으로 나다니는 후배에게 제수씨가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와이프의 진심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대화도 없고 표정도 없단다. 어쩌면 이제 포기해버린 건지도 모르겠단다. 하나 있는 아이는 쑥쑥 크는데, 잘못한 것은 어렴풋이 알겠는데, 그래서 고치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단다. 대화를 시작하고 싶지만 이미 여러 번 실패한 모양이었다. 집에서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무거운 공기에 질식되어 다시 밖으로 나오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사람을 좋아하고 형님 동생에게 인기가 많은 후배였지만, 정작 집에서는 외톨이었다.
(Image Source: catawiki)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기 무섭게 조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랑은 원래 아프다거나 부부의 연은 칼로 물 베기라는 클리셰부터, 원래 남자는 집에 무관심해야 아이가 잘 큰다는 희망적인 헛소리까지. 쏟아졌다. 하지만 의기소침한 후배는 이 모든 이야기를 진심으로 한 땀 한 땀 경청하고 있었다. 조언이 나올 때마다 이쪽저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열심히 듣고 있었다. 어깨부터 등까지 꾸부정하게 말린 것이, 먹을 것이 간절한 새끼곰 같았다.
나도 이혼할 뻔했던 이야기를 해줄까, 고민이 됐다. 그게 도움이 될까, 상황이 다른데, 설명하려면 긴데, 초면인 사람들도 있는데 괜찮을까, 등등 망설임을 유발하는 생각들이 꼬리를 무는 사이, 유난히 한 마디도 안 하고 계시던 한 형님이 입을 열었다.
"설거지를 해봐."
"네, 형님?"
"음, 다 필요 없고 내일 집에 들어가서 딱 한 가지만 해. 설거지를 해."
"..."
"억지로 말하려고 하지 말고."
아니 이 형님은 무슨 농담도...라는 생각이 스치기 무섭게 갑자기 빠져들기 시작했다. 말이 되는 것 같았다. 0.1톤짜리 덩치가 아무 말 없이 앞치마를 둘러메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 뒷모습이 상상이 됐다. 의기소침하게 꾸부정한 뒷모습이 그려졌다. 내가 사실 미안한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라는 상상 속의 말풍선이 뒤통수에 떠 있었다. 상상 속의 처제가 상상 속의 후배에게 다가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슬쩍 설거지를 거드는 모습이 그려졌다.
다음 날 바로 문자를 보냈다.
어제 좋은 형님 소개 땡큐. 설거지는 잘했고? ㅋㅋ
한 번 해봤어요 설거지... ㅎㅎㅎㅎ
ㅋㅋ 훌륭하다. 브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