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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줍음 Jul 16. 2023

문학소녀 여고생, 공대에 가다!

나의 열아홉 살과 스무 살 시절

<프롤로그>

나의 지난 이야기를 써보려고 한다. 살면서 한 번은, 언젠가 꼭 한 번은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나의 20대와 30대 시절의 이야기다. 나는 어느 덧 40대 후반의 나이가 되었고 3년전 퇴사하여 개인사업자로 독립했다. 현재 프리랜서 강사이며, 대학교 겸임교수이다.  집에서는 3남매의 엄마이며, 여전히 공부하고 있는 박사과정생이기도 하다. 이 글은 나의 20살부터 36살까지의 이야기로, 내가 엄마나 아내나 딸이나 며느리가 아닌, 한 사람의 독립된 인간이자 사회인으로서 내가 되어가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다. 


<1> 문학소녀 여고생, 공대에 가다!


중, 고등학교 때까지는 교대에 가서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국민학교 시절, 6년 동안 만났던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이 모두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유독 무섭고 엄한 선생님도 계셨고, 너그럽고 친절한 선생님도 계셨다.  1980년대, 시골에서 자라 주변에 좋은 어른이나 모델링할만한 직업을 별로 보지 못하고 자라서인지... 나는 선생님을 보며, 나도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된다면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선생님이란 당시의 나처럼 '힘들고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에게도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좋은 사람, 좋은 어른'이었다. 아마 그 당시에 감명 깊게 보았던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 속에 나왔던 키팅선생님 같은 선생님을 선망했던 것 같다.


그런데 갑자기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정치경제 선생님의 수업을 듣게 되면서, 선생님의 사상과 가치관에 매료되었다. 선생님의 생각은 나에게 매우 신선하고 자극적이면서 멋있었다. 그때까지 희망했던 교대진학 계획이 갑자기 시시하게 느껴지면서 '진정한 학문은 사회과학이다'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래도 원서를 더 쓸 수 있는 형편만 되었다면, 나는 교대에도 진학원서를 썼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입학전형 결과와 나의 수능점수를 비교해 보면 나는 교대에 붙고도 남을 성적이었다. 참고로 당시의 교대 커트라인은 지금처럼 지 않았다, ㅎㅎ


하지만 지금은 고인이 된 친정아버지는 딸을 대학교에 보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으셨다.  아버지가 자주 하시던 레퍼토리 중에 ‘여자는 고등학교까지만 나와도 된다. 고등학교만 나와도 대통령 부인도 되고, 취직하는 데도 전혀 지장이 없다’고 누누이 말씀하시곤 하셨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육영수 여사(영부인)가 고등학교 졸업의 학력이어서, 우리 아버지뿐만 아니라 그 시절에 그런 생각을 하던 어른들이 꽤나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던 아버지는 큰오빠와 작은오빠는 대학에 보내주셨지만, 딸인 나는 대학공부를 시키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으셨다. 그나마 내가 대학에 갈 수 있었던 건 엄마의 설득 덕분이었다. 엄마는 5남매 중 맏딸로 태어나 엄마의 표현에 의하면 '외할머니 밑에서 고생만 죽어라 하고', 국민학교 문턱도 가보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으로 맺히신 분이었다.


그런 엄마는 내가 고3 때 밤늦게까지 잠 안 자고 공부하는 모습을 안쓰럽게 여기셨고, '기왕에 공부한 거 아까우니 S도 대학에 보내자'라고 하셨다. 지금에 와서 당시 상황이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버지는 분명히 '그럼 당신이 S는 책임지고 가르치라고. 나는 딸자식 가르칠 돈은 없다'라고 아마 큰소리를 내며 다짐을 받았을 것이다. 게다가 막내인 나의 대학진학을 위해 아마도 언니, 오빠들의 거듦도 한몫했을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간신히 집에서 다닐 수 있는 국립대에 단 1장의 원서를 쓰도록 허락을 받았다. 당시 우리 집은 대전이었고, 내가 가고 싶어 하던 교대는 전국에 여러 곳이 있었지만, 집에서 제일 가까운 곳은 청주와 공주교대였다. 내가 교대에 진학한다면 나는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 저학년은 음악이나 체육, 미술 등 여러 과목 수업을 담임 선생님이 직접 해야 했기에 나는 교대를 졸업하기 위해서는 예체능 교과목 이수를 하기 위해 별도의 학원을 다녀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당시의 이러한 상황으로 나는 교대를 지망하지 않았고 아니 못했고, 내가 쓸 수 있는 단 한 장의 원서를 집에서 통학할 수 있는 국립대에 지원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나는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나는 수능 1세대, 94학번이었고, 다들 처음 치르게 되는 입시상황에 소극적인 하향지원을 많이 했다. 나 역시 눈치경쟁 속에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사회학과에 지원했으나 뜻하지 않게 나보다도 더 점수가 높은 인원이 몰리며, 나는 어이없이 입시에 탈락하고 말았다. 당시 전기대 입시에 떨어지고 다니던 고등학교 교무실에 갔을 때, 선생님들의 반응이 '니가 여기 왜 왔니?'하며 어이없어 하던 게 생각난다. 전기대에 떨어진 아이들 중 나의 수능성적이 현격하게 제일 높았었다.


그렇게 나의 스무 살, 사회로 향한 첫 도전의 결과는 실패였다. 나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탈락'의 결과를 믿을 수가 없어서 기어이 내가 지원했던 대학교에 혼자 찾아갔었다. 어둑해진 저녁, 낯선 캠퍼스에서 합격자 게시판에 아무리 찾아도 내 이름이 없음을 확인했을 때의 그 참담함이란!!!! 마치 세상으로 향한 나의 첫 도전이 거부당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실의에 빠져있던 나는 우연히 작은오빠 친구로부터 대전에 또 다른 국립대학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후기 원서를 제출하여 국립대학교 공대에 가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회색빛 스무 살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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