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중순
길을 걷다 문득 살랑하고 스쳐 지나가는 꽃 향기에 고개를 두리번 거린다. '이 근처에 서향 나무가 있었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살피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눈앞에는 꽃피우기 전인 벚나무와 자잘한 꽃을 피운 회양목뿐. '설마 회양목 향기인가?'하고 급히 검색해 보니 회양목이 맞다. 왜 여태 몰랐을까. 우리 아파트 화단뿐 아니라 집에서 가까운 행정복지센터에서 지구대까지 담벼락을 따라 회양목이 심어져 있다. 자연 관찰을 여러 해 이어오고 있지만 회양목과 꽝꽝나무는 구별하지 못한다. 회양목과 꽝꽝나무는 흔히 도로와 인도를 구별하는 화단이나 건물과 인도를 구별하는 화단에 나지막하게 자리하고 있을 때가 많은 것 같다. 이름과 꽃은 낯설어도 나무 사진을 보여주면 '아, 어디선가 본 것 같아.'하고 대답하는 이가 많지 않을까. 그나마 꽃이 피면 알아볼 수 있는데 향기는 회양목이 훨씬 진하단다. 회양목 향기가 이리도 진하고 향기롭다니. 어쩌면 작년에도 이렇게 똑같이 감탄했을지도 모른다. 매년 같은 꽃을 보고도 이름을 까먹고 새롭게 검색하는 일이 부지기수라 향기 역시 충분히 잊을 법하다. 이렇게 글을 쓰고도 내년 이맘때가 되면 어디서 스며든 꽃 향기에 근원지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쉽게 까먹으면 매번 다시 찾아야 하는 번거로움은 있지만 볼 때마다 새롭게 놀라며 감탄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왕 회양목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는 말. 식물 입장에서는 이러한 발언이 굉장히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내 눈에는 회양목 꽃이 꽃처럼 보이지 않는다. 식물 전문가 입장에서는 무식한 발언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꽃'하면 금방 떠올리는 모양새와는 많이 다르니까. 암술, 수술이 있어도 꽃잎이 없으니 알아보기 어렵다. 참 신기한 건 반대로 암술, 수술이 안 보이는 꽃에는 관대하다. 예를 들어 장미나, 일부 동백꽃, 금목서, 은목서처럼 꽃잎만 모여있는 걸 봤을 때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회양목 꽃을 볼 때는 의구심을 갖고 바라본다. 송충이로 오해받는 오리나무 꽃에 비하면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지만 그래도 꽃잎만 갖추고 있는 꽃들보다는 오히려 번식이 가능한 이 쪽이 진짜 꽃임에도 불구하고 눈앞에서도 꽃으로 인식하지 못할 때가 있다. 오늘은 회양목 안에서 작은 곤충을 발견했다. 이렇게 작은 꽃은 누가 수분을 도와주나 궁금했는데 정말 가까이에서만 볼 수 있을 만큼 작은 누군가가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걸 우연히 목격했다. 작년 가을 금목서나 은목서 주변이 향기로 가득함에도 벌레나 곤충은 모여들지 않았던 것이 떠오른다.
지난 주말에는 봄비가 내린 후 급격히 기온이 내려가면서 다시 겨울 패딩을 꺼내 입었다. 한창 추웠던 이틀 동안은 동네 풍경도 변화를 잠시 멈추었지만 비가 그치자마자 가지 끝으로 새로운 색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개복숭아나무, 벚나무, 개나리 등 봉오리들이 각자 꽃잎을 드러내며 커지고 화살나무 끝으로는 뾰족하고 연둣빛을 띈 잎순이 등장했다. 돌 틈새나 바닥에도 들풀들이 올라와 꽃을 피운다. 봄까치꽃이 제일 먼저 등장했고 그다음으로는 민들레와 괭이밥도 뒤따르고 있다. 이제야 막 올라온 들풀과 꽃을 반가워하는 것도 잠시, 우리 집 근처 공원에서는 벌써부터 제초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어찌 된 연유인지 몰라도 이렇게까지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 내막을 모르니 무턱대고 부정할 수는 없지만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의구심만큼은 어쩔 수 없다.
몇 번의 봄비가 다녀가고, 꽃 주변으로는 등에가 제법 날아다니는 중이다. 공원 바닥에는 개미들도 부지런히 오가고 넓은 화단 주변으로는 나방이나 거미들이 하나, 둘 등장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벌레나 곤충을 보고 이렇게 반가워한 적이 있을까. 작년에 만난 수많은 벌레와 곤충에 대한 기억이 이렇게 반가움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동물도, 식물도, 곤충, 벌레도 자주 보고 알아갈수록 정이 쌓인다. 몰랐을 땐 혐오스러웠던 것도 누구인지 알고, 나와는 어떠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알고 나면 이내 마음이 조금씩 열린다. SNS에서는 거의 매일 같이 그날 관찰한 자연 풍경을 공유한다. 곤충이나 벌레 사진을 올릴 때는 조심스러운 마음도 생기지만 이렇게 자주 보다 보면 누군가도 실제로 마주쳤을 때 두려움보다는 반가움으로 느끼길 바라며 최대한 징그럽지 않아 보이는 형태로 찍어 올린다. 요즘에는 나를 두고 자연 관찰자라는 별명으로 불러주는 분들도 꽤 늘었는데 실은 이런 나도 몇 년 전까지는 식물 이름을 잘 모르고, 벌레나 곤충을 징그러워했다. 관찰을 이어간다고 지식이 늘어나진 않지만 적어도 무언가와 누군가를 보고 겁을 먹기보다는 관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용기는 생겼다.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두가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존재를 무조건 기피하기보다는 알아가려는 마음을 가지는 건 좋지 않을까. 나의 기록이 누군가의 마음을 여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