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집중해"에 대한 솔직한 고백
"너에게 집중할 시간이 많지 않아, 지금을 즐겨"
"너에게 집중할 시간이 많지 않아, 너에게 집중해"
지난 10년간, 청첩장을 받으며, 돌잔치 초대를 받으며, 가장 많이 들었던 말들이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한편으로는 고마웠고 한편으로는 불편했다.
10년 전 그때, 마치 서른 전에 결혼을 하지 않으면 큰 일이라도 일어날 듯 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너에게 집중할 시간이 많지 않아, 지금을 즐겨"를 듣게 되었다.
10년 전 나와 친구들은 서른을 앞두고 있었다. 내 친구들은 하나둘씩 결혼을 했다. 서른을 넘겨서는 안 된다고 하며 아홉수가 좋지 않다는 부모님의 고집 때문에 쫓기듯, 28살 12월에 결혼해야 했던 친구도 있었다.
청첩장을 받을 때 혹은 결혼 이후, 그들은 늘 "지금이 너에게 집중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고 생각해"라고 말하곤 했다. 물론 그들도, 그들이 내게 그 말을 10년간 더 하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누구도 나를 포함한 몇몇이 그 말을 10년간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으론 고마웠다. 그도 그럴 것이 남들 다 서른 전에 결혼한다고 하니 초조한 마음과 미묘한 불안함이 커졌었다. 남들 다 가는 대학에 가지 못하는 그런 심경이랄까. 대개의 경우 "너에게 집중할 시간이 많지 않아"에는 "지금을 즐겨"라는 말이 덧붙여졌다. 이 말들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초조함이나 불안함은 한결 덜 해졌다. 솔직하게 말하면 어느 순간에서부터 인가 나는 그 미혼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즐겼던 것 같다. 그림 속에서 혼자 책을 읽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여인처럼, 그렇게 마음껏 지금을 즐겼다.
그러나 한편으로 가끔씩은 불편하기도 했다. 그들 중 일부가, 결혼 이후, 나에게 집중하는 이 자유로운 시간을 부럽다는 듯이 말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진, 내 마음 한편에 있는, 결혼에 대한 불안함과 초조함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그럴 때마다 나는 "난 나에게 너무 집중하지"라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그럼에도, 둘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결혼이라는 현실이 드라마나 영화처럼 아름답거나 쉽지 않음을 짐작했기에 그 친구들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아직 그들이 내 친구라는 사실이 내가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했음을 알려주는 증거가 될 것이다.
서른다섯을 넘자 출산과 육아에 한창인 친구들이 "너에게 집중할 시간이 많지 않아, 지금을 즐겨" 혹은 "너에게 집중해"라고 했을 때 그 말이 절실하게 와 닿았다.
서른다섯을 넘자 미혼보다 기혼이 많아졌다. 서른다섯이라는 숫자가 주는 초조함이나 불안함이 인간관계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었다. 서른다섯은 마치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기에 적합한 마지막 시점과 같았다. 나와 내 친구들은 거의 다 결혼을 한다면 아이를 낳고 싶어 했다. 그러다 보니 늘 출산적령기라고 불리는 그 서른다섯이 주는 걱정 때문에 다들 서른다섯을 넘기지 않고 싶어 했었다.
이미 결혼한 친구들이 아이는 최대한 어릴 때 낳는 것이 좋다고 했던 것도 영향을 주기는 했었다. 친구의 충고는 20대와 30대의 출산을 경험하며 나이에 따라 출산 이후의 회복에 차이가 있음을 경험한, 경험자의 이야기였다. 경험자인 친구들의 충고는 우리에게 믿음을 줄 만했다.
무엇보다 엄마가 된 친구들에게는 개인으로서의 삶이 거의 없었다. 남편이나 도와주시는 분이 있다고 해도 아이를 기르는 것은 이상하리만큼 엄마인 친구들의 몫이 되었다. 그래서 그 친구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아이를 낳아 기르는 기쁨만큼이나 힘겨움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육아는 그림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그림 속에 담긴 어머니와 아이의 모습은 평화롭지만 내가 보고 들은 육아는 전쟁에 가까웠으며 수많은 고민의 연속이었다. 만약 결혼을 다룬 드라마와 현실 사이의 거리가 10정도라고 한다면, 육아를 다룬 그림과 현실 사이의 거리는 최소한 100정도일 듯 했다.
좌측 Kate Elizabeth Olver, Woman and Child Reading, 19th, Private Collection
우측 Ida Silfverberg, Woman teaching a Child to Read, 1857-65, Serlachius Museums
그래서 출산과 육아에 한창인 친구들이 "너에게 집중할 시간이 많지 않아, 지금을 즐겨" 혹은 가끔 "너에게 집중해"라고 했을 때 그 말이 얼마나 절실한지 알 수 있었다. 친구들 덕분에 나는 미혼인 이 시간이, 이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지를 종종 깨닫곤 했다.
그래서인지 서른다섯이 지났을 때 내게는 결혼에 대한 위기감은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상태였다. 늦은 나이라면 이왕이면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내가 만난 사람은 늘 결혼하기에 적당한 사람이었다. 지금을 즐기고 있다고 말하긴 했으나 초조함과 불안함을 완전히 지울 순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너에게 집중해"가 아니라 "지금을 즐겨"였다면, 조금은 덜 상처 받았을지 모른다.
"너에게 집중해"가 내게 상처가 되었던 그때, 나는 결혼을 생각하던 사람과 막 헤어졌었다. 확신하거나 단언할 수는 없으나, 나는 그 사람을 사랑했다. 그 사람을 위해 내가 싫어하는 일을 하며 내게 버거운 그 모든 상황을 견디려고 했었으니까. 나는 태연한 척 그에게 먼저 헤어짐을 고했으나 그가 나를 잡아주길 바랬었다. 나는 그를 쉽게 놓을 수 없었다.
그런데 오랜 기간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던 남자 친구와 드디어 결혼을 결정하며 청첩장을 준 그 친구는, 내게 "너에게 온전하게 집중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아, 너에게 집중해"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에 많이 서운했다. 적어도 내 절실함을 그녀가 알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친구들에게 그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친구들은 내 절실함을 알았다. 다만 그가 썩 적당한 사람이 아님을 알았기에 친구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사람을 반대했었다. 다만 그녀를 포함한 극히 일부만이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고 말했다. 그 덕분에 아마 나는 그녀를 더 많이 믿었던 것 같다. 그녀가 나를 이해해주리라는 그런 믿음 말이다. 그렇게 그녀를 믿었던 만큼 실망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내게 필요한 위로는 "너에게 집중해"가 아니었다. 적어도 그 순간 "너에게 집중해"는 적절하지 않았다. 아마 그때 나는 무슨 말을 들었어도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녀가 평소에 내게 말했던 '시간의 흐름에 맡겨보자'라는 말이라면 위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게 더 이상 그녀는 친구는 아니었으나 나는 그녀의 결혼식에 가서 축하도 했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어쩔 수 없이 그녀와의 인연도 이어졌다. 그녀 덕분에 인연을 쉽게 맺기는 쉬워도 끊기가 어려움을 배웠다.
그런데 그녀는 내게 또 "너에게 집중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다시 들으며 한동안 불편하며 불쾌한 감정에 시달렸다. 그 감정들은 쉽게 가시지 않았고 나는 이 말이 트라우마처럼 남았음을 알았다. 덕분에 내 예민함과 섬세한 감각들이 완전히 회복되었음도 알았다. 차라리 그녀가 "너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아, 그러니까 지금을 즐겨"라고 했다면 나는 좀 덜 상처 받았을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을 즐겨"와 "너에게 집중해"라는 말은 그 의미는 차이가 없다. 단지 같은 의미의 말을 어떻게 다르게 적절하게 표현하여 상대를 위로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어쩌면 상대의 기분에 대한 배려의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집중해"보다는 "지금을 즐겨" 였으면 한다. 이것도 헛된 기대이고 바람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