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니테오 Aug 27. 2019

#44 걸음을 맞추어 걷는 것

나란히 걷는 것은 아마도 함께 걷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Vincent van Gogh, Starry Night over the Rhône, 1888, Musée d'Orsay, Paris



반 고흐 Vincent van Gogh의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에 Starry Night over the Rhône>는 별빛이 쏟아지는 강변을 걷고 싶게 한다. 이 그림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그림 오른편 아래에 나란히 걷는 연인들 덕분인 듯하다.



그 사람과 함께 걸었던 그 밤은 그림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비가 많이 내린 제법 쌀쌀한 늦은 밤이었다. 추운 날씨 탓에 살얼음이 언듯 했다. 지상의 건물들은 밝았지만 지하로 내려가는 그 계단에는 조명이 제대로 없어 꽤 어두웠다. 계단은 길었고 경사도 가파른 편이었다.

하필이면 나는 앞이 뾰족하고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비 오는 밤, 높은 구두를 신고, 살얼음이 언 듯 한, 어두컴컴하여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길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는 일은, 매우 불편했다. 평소처럼 빨리 내려갈 수 없었다. 미끄러질까 봐 조심스럽게 한 계단씩 내려가야만 했다. 내가 갑자기 발을 헛디뎌 넘어져서 발목에 금이 가거나 혹은 부러져 깁스를 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내게는 함께 계단을 내려가던 사람이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그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는 나를 두고, 그는 성큼성큼 혼자서 내려갔다. 아니다. 내려가 버렸다. 계단을 다 내려간 그 사람이 나를 돌아보았을 때, 나는 아직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내게 내려갈 계단은 반이나 남아 있었다.

이미 다 내려간 그 사람은 내가 내려오길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라는 다정한 말이나 넘어지지 않게 팔이라도 잡아주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꽤 많이 서운했었다.



우연히 당신을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신을 만나기 바로 전날, 나는 넘어져서 다쳤었다. 종종 넘어지긴 했으나 그날은 좀 크게 다쳤었다. 그래서 당신을 만난 그날 나는 걷기가 힘든 상태였다. 깁스를 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평소와 같이 빨리 걸을 수 없었다. 심지어 한쪽은 조금 더 심하게 다쳐서 조금 다리를 절기도 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평소에 빨리 걷던 당신은 내가 이상한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내 느린 걸음에 맞추어 아주 천천히 걸어 나를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그런 당신에게 나는 아주 많이 고마웠었다. 꽤 오랫동안,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사람은 나와 함께 걸으며 내 걸음에 맞추어 걸어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성큼성큼 걸었고 나는 늘 그 걸음에 맞추려 했었다.


비 오던 그 밤에 그 사람과 함께 걷는 나를 보았다면 누구도 그와 나를 연인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그와 나는 기껏해야 동료 정도로 보였을 것 같다.

평소에도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걸음이 빠른 편임에도 이상하게도 그 사람과 나는 함께 걷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사람과 나의 걸음은 늘 그렇게 맞추어지지 않았다. 그 사람은 늘, 나보다 조금 더 앞에 있었던 것 같다.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그 사람과 내가 나란히 걸었다고 할지라도.


내 기억이 왜곡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때 내 기분이 그랬던 것 같기 때문이다. 그 사람과 함께 걷고 있던 그때마다, 나는, 늘, 내게 너무 먼 듯한, 내 옆의 그 사람에게 맞추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력하여 걷는 그런 기분이었던 것 같다.


문득 궁금해진다. 그 사람과 걸을 때, 나는 도대체 왜 그렇게 노력했던 것일까.

더 궁금한 것은 그 순간의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은 나와 걸으며, 함께 걷는 내 상태를, 혹은 내 걸음을 신경 쓴 적이 있기는 할까.

아마 그 사람은 나와 함께 걸으며 내 걸음에 맞추어 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그 걸음에, 나에 대한 그의 마음이 드러났었는지도 모르겠다. 새삼 비참하고 초라해진다. 어쩌면 그와 함께 걸었던 그때, 나는 늘 비참하고 초라한 기분이었던 것 같다.

그와 더 같이 걷지 않았던 게, 그와 더 함께 걷지 않기로 한 것이, 새삼스레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그와 계속 함께 걸었다면 나는 그에게 맞추느라 다른 것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나를 영영 잃었을지도 모르겠다.




Vincent van Gogh, Undergrowth with a Couple, 1890, Cincinnati Art Museum, Cincinnati, USA.


당신과는 그렇게 나란히 걸을 기회가 많이 없었다. 솔직하게는 나 스스로 당신과 걷지 않았다.

그러나 당신과 함께 걸었던 덕분에, 걸음을 맞추어 걷는, 그 사소하며 일상적인 일이, 내 생각보다 의미 있는 일이었음을 알았다.

반 고흐 Vincent van Gogh의 <숲을 산책하는 연인 Undergrowth with a Couple>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도 그래서인 것 같다.


같이 걷는 사람의 걸음을 맞추어 주는 것은 단순한 배려가 아니다.

같이 걷는 사람의 걸음을 맞추어 주는 것은, 상대를, 그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이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43 "너에게 집중해"보다는 "지금을 즐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