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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쇼호스트 김형수 Mar 25. 2019

쇼호스트의 말하기 8

- 듣자! 그 이의 말을!

홈쇼핑 방송은 상품을 가지고 시청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쇼호스트가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상품정보를 전달하는 다소 일방적인 포맷을 갖고 있지만 시청자와의 대화를 나눈다는 마인드로 방송을 준비한다.(최근엔 문자나 카카오톡 등을 이용하여 생방송 중에 시청자와 소통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보통 한 프로그램을 두 명의 쇼호스트가 맡는다. 그들 사이에 연예인 게스트가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홈쇼핑 방송은 시청자와의 만남이기도 하지만 프로그램 진행자들 간의 대화로 채워진다. 사전 전략회의를 통해 상품의 기초정보를 습득하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전적으로 쇼호스트의 몫이다.


초보 쇼호스트들은 방송 전날이면 패닉에 빠지게 된다. 선배도, 피디도 스크립트를 주지 않는다. 학창 시절 공부할 때처럼 종이를 꺼내, 자기가 하고 싶은 말들을 빼곡하게 적어 놓는다. 그러다가, 프레젠테이션 순서는 어떻게 짜지? 메인 쇼호스트 선배는 어떻게 순서를 짤까? 다시 눈물이 나는 상황이 온다. 내가 이렇게 멋진 말을 준비했는데 이런 말 해도 될까? 전화해 봐야겠다. 띠리리링~


초보 : 선배님 내일 방송 어떻게 준비할까요?

어떤 선배 : 어? 잘~!


초보 : 선배님 내일 방송 어떻게 준비할까요?

다른 선배 : 이런저런 순서로 해서, 판넬은 네가 들고~ 어쩌구 저쩌구 해서 잘 하자 멘트 중간에 치고 들어오지 말구~~


한쪽은 무심한 듯하여 서운하고, 다른 쪽은 세심하게 말을 맞춰 줬음에도 불구하고 초보는 내일이 온다는 사실이 불안하다. 

내일이 왔다. 방송 전 분장을 하면서도 자기가 적어서 외운 말들을 열심히 읊조린다. 슛이 들어간다. 호흡이 가빠진다. 귀에 꽂은 이어폰을 통해 피디의 "셋, 둘, 하나! 멘트! 하이~ 큐!" 사인이 들어온다. 한 시간 동안 선배와 함께 열심히 방송하고 스태프들한테 인사를 한 후 스튜디오를 나온다. 머릿속이 멍하다. 무슨 말을 한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열심히 고민했는데 준비한 말의 3분의 1도 못했다. 게다가, 같이 한 선배의 표정이 안 좋다. 


"아니 내가 A를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얘기를 하면 맥락이 안통하잖아...내 얘긴 안 들어? 자기 준비한 말만 하면 어떡하냐고요"


실제 그렇다. 자신이 말할 것만 되뇌느라 옆에 있는 쇼호스트가 말하는 내용을 듣지 못하는 것이 '초짜'의 운명이다. 어디 초보 쇼호스트뿐인가. 일상의 대화에서서로 자기 할 말만 생각하고, 상대방의 말을 새겨듣지 않기 때문 답답함만 쌓인다.

수십 년 간 말을 했지만 말을 잘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상대의 말을 잘 안 듣기 때문이다.


1. 말하는 기법도 중요하지만, 말을 잘하려면 먼저 잘 들어야 한다.


살아온 날들만큼 말을 하고, 듣고 살아왔는데 왜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불안에 빠져 들어야 하는가. 중 앞에서 연설을 하거나, 협상 장에 앉아 있거나, 방송을 하거나 초보들의 문제는 항상 자신이 생각을 A4용지에 적어둔 글자 수만큼 제한한다는 것에 있다.

앞에 앉은 사람 수가 많거나, 카메라가 있거나, 방송 전파를 탄다는 문제가 심리적인 억압을 가하긴 하지만 자신이 수십 년간 말을 해왔음에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엄마에게 말할 때 종이에 적어둔 것을 달달 외워 말한 적이 있던가? 엄마가 중간에 물으면 거기에 대한 답을 자연스레 내놓지 않았던가?

친구와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할 말을 A4 용지에 적어두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주거니 받거니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다.

선배 쇼호스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듣는다면 후배 쇼호스트는 엉뚱한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을 자질이 있다. A4 용지 한 장에 적어둔 내용으로 말할 틀거리를 가두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대중 앞의 연설이라면 말할 주제 서너 가지만  머리 속이나 메모에 담으면 족하다


2. 머리에 새기지 말고 입에 새긴다.


말할 내용에 대한 정보는 머리에 담아야 한다. 그것을 주제화하고 말할 순서도를 만들어 메모한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반복적인 말 연습을 한다.

휴대폰으로 녹화하면 더욱 좋다. 첫 번째 영상과 두 번째 영상, 그리고 이후의 영상들을 비교해 보면 똑같은 주제와 순서로 말하고 있지만, 디테일이 다르다.

첫 번째 예시보다 두 번째 예시가 더 마음에 들 수도 있고, 첫 번째 것이 좀 더 자연스러운 말투라 마음에 들 수도 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머릿속에 PT 하나가 각인될 뿐 아니라, 입에도 새겨지게 된다.

입에 새겨져야 진짜 내 것이 되어 잘할 수 있다. 연습하면서 웅얼거리지 말고 실제 상황에서와 같은 톤과 자세를 견지해야 할 이유들이다.


3. 삶이 전하는 수많은 목소리


다시 잘 팔아야 하는 숙명의 직업인 쇼호스트에게로 돌아가 보자. 이전 장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불특정 다수인 시청자의 입장에 서서 상품을 봐야 하는 게 쇼호스트다. 그 입장에 서려면 잘 들어야 한다.  

TV라는 매체의 소통방식은 일방적인데 어떻게 시청자의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 방송 중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상황들을 잘 돌아보자.


맞벌이어도 양가 부모님 챙겨야 하고, 자식 키우고 하다 보면 매달 적자 걱정을 해야 하는 이웃.

아이를 대신 키워주는 엄마한테 미안해하는 이웃.

아침에 밥 한술 못 뜨고 나갈 정도로 바빠서 패션 따위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중년의 직장인인 이웃. 


우리 이웃의 삶이 던지는 말에 귀 기울여 보자. 동시대를 살아가는 아빠, 엄마, 아들, 딸의 삶이 전하는 소리가 내 마음에 안타까움, 연민, 감동으로 자리하면 그제야 내가 던지는 말이 시청자의 마음에도 들어갈 수 있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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