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가족의 해방을 바라며
멍든 사랑1. 이슬아의 가녀장의 시대(이야기 장수,2023)에 대한 서평
평점: 2/5
두줄평: 나와 비슷한 가족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처음 봐서 신기했다. 익숙한 내용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미 없지 않았으며, 새로운 시각도 없지 않았다.
추석에 오랜만에 만난 엄마가 독서 모임 때 읽어보니 재밌더라며 이 책을 내게 건넸다. 독서 모임을 하는 줄도 몰랐는데, 추천한 책이 <가녀장의 시대>라니 이거 공격인가? 일단 마침 읽고 있는 책이 없어 이 책을 읽었고, 읽는 내내 엄마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며 이 책을 읽었을지 궁금했다.
<가녀장의 시대>는 낮잠 출판사를 운영하는 ‘슬아’라는 성공한 작가와 그들의 모부인 ‘복희’와 ‘웅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복희와 웅이는 슬아의 모부인 동시에 낮잠 출판사의 직원으로서 슬아의 피고용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은 돈으로부터 나온다. 때문에 이 3인 가정은 당연하게도 가녀장인 슬아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슬아가 집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건 당연하지만 아버지인 웅이는 집안에서 담배를 피울 수 없다. 이 독특한 3인 가정은 집이자 동시에 출판사인 한 단독 주택에서 살고 있다.
복희와 웅이가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글을 쓰는 데 관여하는 바는 전혀 없다. 모부는 도서 주문을 확인하고 회계 장부를 정리하는 잡무를 담당하며, 이외에도 복희는 식사를 준비하고 웅이는 집을 청소하며 운전을 담당하는 등 각종 가사 노동을 도맡고 있다. 가부장제에 익숙한 복희와 웅이는 딸 슬아의 가녀장제에 어색함을 느끼면서도, 그들에게 익숙한 또 다른 제도인 자본주의에 의해 그리 어렵지 않게 가녀장제에 적응한다. 공짜로 자신들의 노동을 누렸던 가부장(슬아의 할아버지이자 복희의 시아버지이며 웅이의 아버지)에게는 왜 그리 머리를 조아렸던지 고민하며 말이다. 그리고 한 편으로 복희와 웅이는 자신들의 딸이 이만큼 잘났다는 자부심도 느끼는 듯하다.
작가라는 직업의 특성상 일하는 날과 쉬는 날이 정해져 있지 않고, 일하는 시간도 들쭉날쭉하다 보니 슬아의 가족은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가족의 모습보다는 거의 항상 조금은 건조한 직장 동료의 모습을 띤다. 물론 슬아는 모부에게 항상 주말 및 연장 근무에 대한 수당을 칼 같이 지급한다. 가족은 가끔 볼 수록 애틋해진다고 생각하는 상당히 건조한 가족관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책 속의 가녀장 시스템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누군가는 가족을 이렇게 공적으로 칼같이 대하다니 되바라진 딸이다라며 슬아를 보며 혀를 끌끌 찰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슬아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슬아 입장에서도 1인 출판사 형태로 ‘낮잠 출판사’를 운영하며, 공짜로 모부의 노동력을 취하다 가끔 명절에 용돈이나 넉넉하게 드리는 게 훨씬 가성비 넘쳤을 것이다. 하지만 슬아는 모부의 노동을 착취하고 싶지 않다는 신념이 있었고, 사장이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으며, 가장으로서 그들을 보호하고 싶었기에 ‘가녀장 제도’를 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모부에게 간섭받지 않는 자유에 대한 갈망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나도 집에서 슬아 같은 딸이다. 아직까지는 가족 구성원들 중에서 내가 제일 잘났다. 가장 좋은 대학을 나왔고, 가장 좋은 직장을 다니며, 가족들 중 가장 많은 돈을 벌고 있다. 그렇기에 가족 구성원들 중 내 발화 권력이 가장 강하다. 하지만 안타까운 점은 슬아만큼의 돈은 없다는 점이다. 더욱 안타깝게도 난 또 그 와중에 ‘딸내미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 책 중에서 슬아는 딸내미의 자아란 받고 또 받으면서도 투덜대는 자식의 자아라고 정의한다. 부모 입장에서 나 같은 딸이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세미-가녀장으로서 가장 목소리가 크면서도 굉장히 약아서 ‘딸내미의 자아’를 슬쩍 꺼내 공짜로 맛있는 밥을 먹고, 공짜로 차를 얻어 탄다. 그렇기에 나는 고향인 부산을 떠났다.
나는 내가 부모님의 체력과 돈을 갉아먹는 사랑스러운 강도임을 안다. 나의 사랑스러움이 그들에게 대체불가한 행복을 줬었겠지만, 나는 그들의 젊은 시절을 빨아먹으면서도 그 가치를 몰랐던 강도다. 하지만 그것은 부모의 역할이고 그 가치를 모르는 것 역시 어린 자식의 역할이다. 그렇지만 부모님은 이제 늙었으며 나는 인생의 전성기 언저리에 있는 듯하다. 어른이 된 어린 자식은 ‘딸내미의 자아’를 유지하고 싶지만, 늙은 부모님은 더 이상 내가 강도 짓 할만한 걸 가지고 계시지 않다. 그리고 강도 짓을 당하면서도 자신들이 아직 내어줄 것이 남아있음에 행복해하는 사랑스러운 늙은 부모를 보고 있는 게 난 고통스럽다. 그래서 나는 가족과 거리를 두고 살려고 노력한다.
아마 내게 충분한 돈이 있어서 그들의 가사 노동에 대한 월급의 일환으로 매달 최소 250 만원 씩 두 분께 각각 드릴 수 있었다면, 나도 부모님과 함께 수원에서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는 그만한 돈이 없고, 부모님의 노동을 공짜로 누릴 만큼 면이 두껍지도 못하다. 내가 부모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독립뿐이었고, 남동생의 독립을 종용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나는 나의 가족을 사랑한다. 하지만 난 내 가족들이 가족에서 해방되었으면 한다. 우리 부모님은 우리 남매를 끔찍이 사랑하신다. 어쩌면 자기 자신들보다 더 우리 남매를 사랑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이 가끔은 끔찍하다. 나는 부모님을 사랑하지만 그 정도의 끔찍한 사랑을 부모님께 가지고 있지는 못하며 부족한 사랑을 돈으로 메울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나의 가족에게 개인의 삶을 선물하고 싶다.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는 개인의 삶 말이다. 엄마, 아빠, 딸, 아들이란 역할에서 벗어나 각자의 이름을 가진 개인으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아니면 적어도 엄마, 아빠라는 역할에서만이라도 그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다. 슬프게도 늙은 우리 엄마, 아빠는 더욱 늙은 그들 부모의 자식으로서 아직까지도 열심히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개인의 삶을 선물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이건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돈이 부족한 게 아닌지 생각해 봅시다’라는 문장에 걸맞게 슬아는 돈이 많이 드는 해결책을 내게 제시해 줬다. 슬아도 아마 나처럼 자신들의 모부를 부모 역할에서라도 해방시키고 싶었기에 고용인-피고용인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 돈이 많이 들긴 하지만 슬아의 해결책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방법은 비싸다는 것 이외에도 가족들끼리 정이 없어져 남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부작용이 있다. 돈을 주는 입장과 받는 입장은 수직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족의 노동을 인정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순간 가족으로서 서로 조건 없는 사랑을 주고받고 있는지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순간, 공짜는 쉽게 무가치해지고 막 다루어진다. 물론 대가를 돈이 아닌 ‘사랑’으로 지불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기 쉽다는 것을. 가족들과 건조한 관계가 되는 것보다 자신이 부모를 막대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두려웠기에 작품 속 슬아는 부모와 고용인-피고용인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 건조한 가족관을 가지고 있는 슬아와 나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에 땅을 치며 후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선택이든 후회는 남을 수밖에 없다. 어른이 된 딸내미는 그 후회를 감당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한 편으로 작품 속 ‘슬아’가 아닌 작가 ‘이슬아’는 그들의 모부인 ‘장복희’와 ‘이상웅’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현실 인물을 등장시킨 자전적 이야기를 수필이 아닌 소설로 쓴 걸 보면 아직 그녀도 세미-가녀장이면서 가끔가다 ‘딸내미의 자아’를 꺼내는 나처럼 미숙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책 속 웅이의 말처럼 소설이란 거짓말들을 모아 진실을 가리키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현실 이슬아 씨도 나도, 그리고 작품 속 슬아도 모든 그녀들이 스스로의 지향점에 다다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마지막으로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 역시 본인들이 원하는 가족의 형태를 성취하시길, 성취하지 못하시더라도 그 실패의 과정에서 인간적인 희로애락을 풍부히 느끼시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