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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멍든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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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서윤 Feb 22. 2023

사랑스러운

멍든 사랑 0. 사랑의 불가능성에 관한 에세이


    누군가 내게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었으면 한다. 사랑이 무엇인지 도저히 모르겠기에 누군가 사랑의 정의를 내게 가르쳐줬으면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우리들은 동일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각자 다르게 세상을 해석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세상은 동일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색과 모양을 띈다. 완전히 동일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기에 너와 내가 느끼는 감정의 결, 색, 깊이는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장 내밀한 감정으로 여겨지는 사랑에 대해 각기 다른 정의를 가진 채 사랑을 찾는다.


    때문에 나의 사랑을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며, 너의 사랑을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다. 너는 사랑을 정의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나의 사랑을 정의할 수 없다. 나는 나의 사랑을 정의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임에도 내가 겪었던 것들이 사랑인지 확신할 수 없기에 사랑을 정의할 수 없었다. 지금의 내가 '사랑'하면 떠올리는 것들은 행복한 두 사람의 눈 맞춤, 포옹, 키스, 결혼 따위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사랑의 작은 조각들만을 끌어안을 뿐이고, 사랑 역시 이런 것들의 몇 단편들만을 끌어안을 뿐이다. 즉, 내가 '사랑'이란 단어를 듣고 떠올리는 것들이 결코 사랑 그 자체를 의미하지 않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사랑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는 사랑이 아니라고 굳게 확신할 수 있었던 걸까?


    나는 사랑이 마냥 아름답기를 바랐고, 나의 모든 부분을 이해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을 지구에서 찾고 싶었고,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당연히 상대방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모순되게도 세상이 마냥 아름답지 않음은 인정하면서도 그 세상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감정만큼은 마냥 아름다울 것이라 기대했었다. 나는 중력에 굳게 묶여 있는 주제에 둥둥 떠다니면서 핑크색 구름 속을 헤엄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순진한 어린애였다. 그 순진한 생각을 바탕으로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내 기대에 어긋나는 것들이 진정한 사랑일리 없다며 결론 내렸다.


    지금은 예전만큼 삶에 대한 기대가 크진 않다. 애초에 나는 삶에 기대를 가질만큼 괜찮은 사람이 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기대와 많이 달랐던 삶의 거짓되지 않은 모습을 그저 바라 볼 뿐이다. 이런 세상에서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너'는 없다. '너'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나'도 없다. '나'는 '너' 그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라고 믿는 '너'의 어떤 모습, 어쩌면 내가 만들어 낸 '너에 대한 환상'을 좋아하는 걸지도 모른다. 이를 인정할 수 없었고 인정하기도 싫었던 날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사랑의 불가능성을 인정한다. 삶에 대한 기대를 꽤 포기했기에 이런 인정이 가능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사랑의 불가능성을 인정한 걸 포기라기보다는 그냥 사랑의 또 다른 하지만 거짓은 아닌 어떤 면을 발견한 거라 믿고 싶다. 바라고 기대했던 것과 많이 달랐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말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을 생각해보자.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은 분명 연인 간의 사랑과 다르다. 하지만 서로를 아끼고 이해하고자 하고 이해한다고 믿는다는 점에서는 그다지 다르지 않다.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는가? 사랑한다. 그렇다면 나는 부모님을 사랑하는가? 사랑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부모님은 자식으로서의 나를 사랑하는 것이고, 나는 부모님으로서의 부모님을 사랑한다. 부모님이 나의 모든 면을 알지 못하기에, 그들은 나의 모든 면을 사랑하지 못한다. 부모님은 친구로서의 나를 모르고, 누군가의 연인으로서의 나를 모른다. 한 평생을 같이 살아온 가족이지만 부모님은 자식으로서의 나를 알고 사랑할 뿐이다. 부모님은 나의 모든 부분을 사랑한다 말하지만 부모님이 나의 모든 부분이라 믿는 것들은 친구, 연인, 직장 동료 등 나의 여러 모습들이 자식이라는 한 면에 사영된 그림자에 불과할 뿐이다.


    내가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 역시 부모로 만난 나의 부모를 사랑할 뿐이다. 나는 그들이 연인으로서, 친구로서, 사회인으로서, 누군가의 자식으로서는 어떤 인간이지 알지 못한다. 결국 나는 가장 오랫동안 사랑을 주고 받은 사람조차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내가 길어봐야 몇 년 만난 '너'의 모든 부분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렇기에 완벽하다고 혹은 완전하다고 생각되어지는 사랑은 불가능하다. 사랑의 불가능성이 서글프긴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잘못은 아니다. 그저 '나'와 '너'가 서로를 사랑하기에 가지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일 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뒷면을 끝끝내 보여주지 않고 사라지는 저 달과 같은 것이라는 말을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책에서 봤었다.

    '나'와 '너'는 달의 뒷면을 가지고 있다.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지만 동시에 누군가는 알아주었으면 하는 비밀스런 뒷면 말이다. 뒷면은 내가 너에게 보여주지 않은 나의 또 다른 배역이기도 하고, 너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한 나의 부끄러움이기도 하다. '우리'는 사랑에 빠지고 행복에 허우적거린다. '나'는 '너'를, '너'는 '나'를 온전히 완전히 이해한다며 달의 뒷면까지도 사랑한다고 외친다. 하지만 우습게도 머지않아 서로에게 변했다며 소리치고 눈물 흘리고 화를 내는 바보짓을 반복한다. 변한 것은 그 무엇도 없음을, '나'와 '너'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음을 알고 있음에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내가 너를, 네가 나를 사랑했던 이유는 환하게 빛나는 달의 앞면 때문이었고 그것은 너와 나의 진짜 모습이지만 전부는 아닌 어떤 모습이었다. 우리는 상대방의 전부를 알 수 없고, 이를 인지하기도 전에 상대방의 일부에 매료되어 사랑에 빠진다. 이것이 우리가 하는 사랑의 근본적 한계이다.


    '한계는 뛰어넘을 수 있다'라고 거짓말하고 싶다. 하지만 한계는 극복할 수 없기에 한계이다. 한계를 극복하길 바랄 수 있겠지만 극복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순간 한계는 더욱 높아질 것이고, 당신의 오만과 무례에 상대방은 아파할 것이다. 착각하지 말자.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우리'라고 믿을 수는 있지만, 결국 '우리'는 '너'와 '나'일 뿐이다. 때문에 '나'는 '너'를, '너'는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 한계 위에서 '우리'가 아닌 '나'와 '너'는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무엇을 사랑이라 할 것인가? 무엇이 사랑이길 바라는가?


    '나'는 '너'와 다음의 것들을 인정하는 사랑을 하고 싶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럼에도 '너'의 전부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너' 역시 '나'의 전부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아직 사랑하지 않는 '너'의 또 다른 부분을 사랑하고 싶다. 두렵게도 그것이 '나'의 기대와 완전히 다를 수 있다. 그 때문에 '나'와 '너'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게 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아니라, '너'와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와 '너'가 이런 한계들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사랑을 하고 싶다. 한계를 극복하자 다짐하지 말았으면 한다. 애초에 한계는 극복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우리'가 한계에 두 발을 디디고 '나'와 '너'로 빛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다. 나는 당신이 무엇을 사랑이라 여기는지 모른다. 당신의 사랑이 무엇이든 간에, 나의 사랑과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당신의 사랑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 아마 여기서부터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사랑스러운 사랑이 시작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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