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든 사랑2
'소원동'이라는 가상의 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부산에 '소원동'이란 지명은 없습니다.
사랑했던 당신에게 열등감을 담은 제 사랑을 드릴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당신도 나도 다음 사랑은 티 없이 맑기만을 빌어봅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정말 사랑했습니다. 우리 앞으로는 각자 행복해봅시다. (24년 4월 6일)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연인에게 열등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사랑을 느끼는지 궁금하다.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해보고 싶을 정도이다. 나의 멍든 사랑이 인간적인 것인지 궁금하다. 인간은 양가감정을 느낄 수 있는 동물이라지만 이런 마음을 정상적이라 할 수 있는 건지 궁금하다. 아마 비정상적인 감정일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이를 알고 있기에 누구에게도 솔직히 털어놓지 못했다. 내 사랑은 이렇게 이상한 방식으로 복잡하다.
오늘은 가족과 함께 공주의 마곡사라는 절을 다녀왔다. 마곡사는 김장이 한창이었다. 기다란 상판 위에 절인 배추가 쌓여있었고 사람들은 고무장갑을 끼고 배추를 치대고 있었다. 가수 준비생이란 분은 청아한 목소리로 노동요를 뽑아내고, 한편에는 고생하는 분들을 위한 따끈한 오뎅이 준비되어 있었다. 오뎅을 준비하시던 분들은 친절하게도 우리 가족에게 따끈한 오뎅을 나눠주셨다.
오뎅을 받으며 엄마가 ‘부산 오뎅이네요? 우리도 부산에서 왔어요.’라며 너스레를 떨었고, 나눠주시던 분도 ‘어머, 저도 부산 출신인데, 부산 어디서 오셨어요?’라고 물어봤다. 엄마는 아무 생각 없이 ‘소원동에서 왔어요.’라고 말했고, 그분은 ‘어머 촌 동네에서 오셨네요?’라고 농담인 양 웃으며 대답했다. 그 아무 생각 없는 대화에 나는 상처받아버렸다. ‘무례하시네요.’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손에 들린 어묵이 너무 따끈했고 가족들은 어묵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나도 생각과 함께 그냥 어묵을 삼켰다. 어묵은 따뜻하고 고소했고 맛있었다. 그렇지만 한 편으론 치욕스러운 맛이 났다. 누군가가 선의로 베푼 어묵을 먹으면서도 열등감을 느끼는 비틀린 마음이 부끄러웠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이렇게 모자란 사람이다.
나는 내가 태어났고, 내 가족이 지금도 살고 있는 부산을 사랑한다. 바다와 산, 강이 복잡하게 굽이치고, 한 줌의 땅만 있어도 악착 같이 집을 짓고 산 부산 사람 특유의 생명력을 사랑한다. 하지만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소원동’이란 동네는 부산에서 발전이 가장 더딘 동네 중 하나이고, 우리 집이 있는 ‘소원3동’은 ‘소원동’들 중에서도 꼴찌였다. 중학생 때는 소원1동 출신들이 소원3동 애들을 보며 ‘쟤네도 해운대구야?’라고 키득거렸다. 부산 전역에서 학생이 모이는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는 센텀시티 출신들로부터 ‘요새는 개나 소나 아파트에 센텀 붙이더라.’라는 말을 들었다. 센텀시티에서 한참 멀지만 아파트 이름에 센텀을 붙이는 개나 소나 한 동네가 소원동이며, 소원3동은 그 마저도 불가능한 동네였다.
상처를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나도 우리 집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동네가 살기 좋은 동네가 아님은 알고 있었다. 분명 남루한 동네였지만 나의 집이었고, 나의 집이 타인의 입에서 거칠고 상스럽게 묘사되는 건 큰 상처였다. 그 당시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어떠한 상처도 줄 수 없다.’라고 되뇌며 내가 받은 상처를 없는 것으로 치부했다. 몇 번이고 되뇌었던 문장이었지만, 마곡사에서 만난 아줌마에 의해 바로 부서지고 말았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상처받는 나약한 사람이다. 몇 번이고 되뇐 정말 좋은 문장이었지만, 그 좋은 문장을 담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옹졸했다.
그리고 이 옹졸한 마음 한 켠에 살고 있는 사랑하는 나의 연인이 있다. 나에겐 6년 간 울고 웃고 싸우면서도 내 곁을 지켜준 아기처럼 말간 얼굴의 연인이 있다. 나의 연인은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 결핍을 모르는 구김 없는 햇살 같은 사람이다. 햇살 같은 연인의 본가는 부산 센텀시티이다. 나의 연인은 어수선한 우리 동네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낡은 우리 가족의 아파트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잘 살지도 않으면서 비싼 위스키를 좋아하는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배경이 이런데도 노력해서 여기까지 오다니 대단하다고 생각했으려나? 아, 이런 뉘앙스의 말은 실제로 들은 적이 있다. 좋아해야 할지 기분 나빠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스스로에게 넌덜머리가 난다.
햇살 같은 나의 연인은 나의 열등감을 알고 있음에도 고맙게도 나를 사랑한다. 그리고 나의 열등감을 알고 있음에도 그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내가 열등감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는 그저 자리를 피할 뿐이다. 마치 비가 오면 사라지는 해사한 햇살 마냥 말이다. 하지만 내가 섭해할 건 없다. 원래 햇살은 날씨가 궂을 때는 볼 수 없는 법이다. 비가 오고, 강풍에 크레인이 무너지고, 태풍에 바다가 요동칠 때는 햇살을 기대할 수 없다. 모든 비를 맞고, 모든 바람을 맞은 후, 태풍에 베란다 창 하나 정도 깨지고 난 이후에야 구름이 걷힌다. 그러곤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이 햇살이 쏟아질 뿐이다. 이 때문에 나는 울었고 우리는 싸웠다. 그럼에도 결국 다시 뜨고야 마는 햇살 때문에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끔은 나의 연인이 나와 같이 비를 맞아주면 좋겠다. 이상한 말이지만 나는 나의 열등감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부모님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사랑을 눌러 담아 나를 빚었다. 그 ‘나’라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 중 하나가 열등감일 뿐이다. 열등감은 분명 추하고 못난 감정이지만 그 감정의 끝은 부족한 형편을 스스로 능력과 가족의 사랑으로 이겨냈다는 자부심과 긍지이다. 요즈음은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 구김살 없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쉽게들 말한다. 그런 사람들이 이 글을 읽으면 비에 젖고 구겨진 나를 피하며, 나의 사랑을 의심할 테다.
하지만 사랑은 그렇게 단편적이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다. 나는 나의 배경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고, 넉넉지 못한 부모를 원망한 적도 있지만 그 보다 더 크고 깊은 마음으로 부모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그리고 이러한 열등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할 생각조차 없는 연인이 원망스럽다가도, 항상 자리를 지켜준 연인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햇살은 잠시 안 보였을 뿐 항상 그 자리에 있다. 내 사랑은 이렇듯 복잡하고 조금은 불쾌하다. 그러나 이 멍든 사랑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며 단 한 톨의 거짓도 없는 진실된 사랑이다. 나도 구김 없는 사랑을 당신에게 주고 싶다. 하지만 나의 사랑은 그렇게 단조롭지 않고, 구김 없는 척 연기할 정도로 내가 뻔뻔하지도 못하다.
그러니 진심으로 사랑하는 당신에게 열등감을 담은 사랑을 바친다. 나는 당신이 비를 맞지 않기를 바라지만, 비를 맞는다면 언제든 나를 불러주길 바란다. 비루한 나의 멍든 사랑을 반질반질 닦아 사랑하는 당신에게 건네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