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의 진주목걸이 탈출기
커트 보네거트의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씨(2013, 문학동네)
미국에서 14번째로 부유한 로즈워터 가문은 본인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로즈워터 재단을 설립하고, 대대로 가문의 장남을 재단 임원으로 임명했다. 재단의 강령에는 '임원이 정신이상 판정을 받으면 즉시 퇴출시킨다'는 조항이 있었고, 이 조항은 로즈워터 재단을 관리하던 로펌의 욕심 많은 변호사 노먼 무샤리의 눈에 띈다. 로즈워터 가의 독자이자 재단의 임원인 엘리엇 로즈워터는 항상 술에 취한 채 SF 작가나 시인들에게 거액의 돈을 후원하는 기행을 반복한다. 노먼 무샤리는 재단을 로즈워터 방계에게 넘기면서 막대한 수수료를 챙기고자 엘리엇의 정신이상을 입증할 증거들을 모은다.
엘리엇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 권력을 쥐고 태어났음에도 무엇이 그리 괴로운지 아름다운 아내를 홀로 남겨 둔 채 술에 취해 미국 전역을 떠돈다. 엘리엇이 최종적으로 정착한 땅은 일 년에 한 번 들릴까 말까 한 로즈워터 가문의 고향 인디애나 주의 '로즈워터 군'이었다. 이 마저도 엘리엇의 아버지가 미 상원 의원이기에 정치 활동을 위해 방문하는 것에 불과했다. 사실상 아무런 연고도 없는 '로즈워터 군'에서 엘리엇은 의용소방관으로 일하며 '로즈워터 재단 사무소'를 운영한다.
로즈워터 재단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로즈워터 군 사람들은 하나 같이 구제불능이다. 로즈워터 군에는 로즈워터 가문에서 운영하는 회사들이 많았으나, 회사 내 모든 작업들이 자동화되면서 사람들은 노동으로 돈을 벌 기회가 거의 없었다. 엘리엇은 경제적으로 한심한 사람들의 말을 상냥하게 들어주며 도움을 주고자 노력한다. 한심한 이들을 도와주는 엘리엇이었지만 스스로는 전혀 돌보지 않았기에 살이 찌고, 사무실에는 이상한 냄새가 났으며 결국에는 아내와 이혼한다.
난 처음 '잉여 인간'이란 표현을 들었던 날을 기억한다. 그 당시 나는 인간의 존엄성을 굳게 믿고 있던 터라 '잉여 인간'이란 표현에 구역질을 느끼며 귀를 씻고 싶었다. 인간인 이상 우린 '잉여 인간'일 수 없다. 개별 인간의 존엄은 필요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간이기에 존엄을 인정받기 때문이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불가침적인 '기본적 인권'이다. 추가적으로 인정되는 인권이 아닌 아주 기본 중의 기본인 인권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요즈음 인간은 돈이 많고 적고에 의해 가치가 결정된다. 그리고 이 논리에 따르면 엘리엇은 높은 권위를 지닌 인간, '로즈워터 군'의 사람들은 있으나 마나 한 잉여 인간일 뿐이다.
한 때 한국의 고위공직자가 '민중은 개돼지로 취급해야 한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얼마 내지도 않는 세금을 가지고 이런저런 행정 복지를 요구하는 시민들이 그의 눈에는 개돼지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이게 상류층이 시민을 보는 일반적인 시각이라면, 그들 눈에는 개돼지 중에서도 잉여 개돼지를 돕는 엘리엇이 진정으로 미쳐 보였을 것이다.
사실 엘리엇도 진정으로 시민들을 생각해서 이런 일을 벌인 건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에 독일에 파병됐던 엘리엇은 작전 중 독일군으로 오인하고 의용소방관인 남성 두 명과 소년 한 명을 총검으로 죽였다. 소방관은 엘리엇이 가장 존경하는 직업이었기에 그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망가져버린다. 자신처럼 한심한 인간이 미국의 돈이 흐르는 강 바로 옆에 붙어살며 양동이, 펌프, 자동급수차 등 온갖 방법을 이용해 끝없이 강물을 마시고 있으며, 대다수의 사람은 이 강을 구경조차도 못한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낀다.
즉, 엘리엇은 모든 것이 자동화된 시대, 인간의 노동이 하찮아진 시대, 돈이 곧 권력인 시대에 고귀함을 잃은 이들의 존엄을 되찾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수치심을 희석하기 위해 그들을 이용했을 뿐이다. 그랬기에 도움을 요청한 이들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쉬운 해결책만을 제시할 뿐이었다. 얼마간의 돈으로 해결하거나 아스피린과 와인을 먹고 한숨 푹 자라는 처방이 반복됐다. 노먼 무샤리가 소송을 시작하고 엘리엇이 '로즈워터 군'을 떠나게 됐을 때 많은 시민들이 엘리엇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직감하고 인사를 하러 거리에 나왔다. 하지만 엘리엇은 자기가 도움을 준 사람들이었음에도 그들을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하며 '반갑습니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엘리엇이 미쳤음을 증명하기 위한 재판이 시작되면서 엘리엇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약 1년 간의 기억을 잃는다. 정신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그는 상원의원인 아버지가 살이 많이 빠졌다며 누가 봐도 정상인으로 보인다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한 편으론 자식이 있었으며 이 모든 상황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하는 아버지를 말이다.
엘리엇이 정신병원에서 혼이 빠진 채 치료받는 동안 '로즈워터 군'의 사람들은 엘리엇에 대한 악담을 쏟아낸다. 그리고 마을의 모든 여자들은 아이의 아버지가 엘리엇이라 주장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미워한다는 사실에 엘리엇은 충격을 받으면서도 갑자기 아버지에게 방계에게 재단을 뺏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한다. 엘리엇은 재단 법률 담당 변호사에게 자신을 아버지라 주장하는 모든 마을 아기들에게 로즈워터 성을 주라는 주문을 한다. 그렇게 엘리엇은 아이 57명의 아버지가 되며 소설을 끝을 맺는다.
이 소설의 부제는 '돼지 목의 진주목걸이'이다. 소설 속 인물 중 누가 돼지일까? 진주목걸이의 가치를 모르며 자신의 고통에 빠져있는 엘리엇? 엘리엇에게 기생하는 로즈워터 군 사람들? 사람들을 개돼지 취급하는 엘리엇의 아버지? 소설을 읽다 보면 등장인물 모두가 돼지처럼 느껴진다. 다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존엄한 인간이 되기보다는 우수한 무언가 혹은 열등한 무언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우수한 혹은 열등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결국 타인의 기준에 맞춰 스스로를 재단하는 의존적인 존재 즉 가축이 된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엘리엇은 자신이 가축 즉 돼지라는 사실에 고통받는 돼지로 보인다. 엘리엇은 돼지에 불과한 자신이 진주목걸이를 치렁치렁 두르고 있음에 수치심을 느낀다.
소설에서 진주목걸이는 막대한 돈을 의미한다. 하지만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돈이 진주 취급을 받을 수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소설 속 부자들은 다들 유산 상속자로 묘사된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 돈을 벌어본 적이 없으며 자신의 노동으로 세상에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 적이 없다. 그들은 어살이 내려다보이는 식당에 앉아 비싼 칵테일과 함께 요리를 즐기며 어부가 짜디짠 바다에서 보람차게 일하는 모습을 내려다볼 뿐이다. 정직하게 일하는 어부가 마치 신 같다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이들이 누리는 것들은 안락하나 권태로우며 무가치하다. 이런 걸 정말 진주라 부를 수 있는가? 어쩌면 엘리엇은 자신이 두르고 있는 게 진주목걸이가 아니라 진주 목줄임을 깨달았기에 57명의 자녀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준 게 아닐까?
우린 돈이 돈을 부르는 세상을 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일하지 않고 돈을 버는 방법을 찾는다. 가끔 돈 버는 데 혈안이 돼있는 사람을 만나곤 하는데, 그분들을 보면 그렇게 돈을 벌어서 어떤 걸 하고 싶은지 묻고 싶다. 내게 돈은 항상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요즈음 사람들이 돈으로 안 되는 건 없다며, 돈으로 안 되는 게 있다면 돈이 부족한 게 아닌지 생각해 보자라는 말을 종종 한다.
나도 이 말에 동의한다. 돈으로 안 되는 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돈으로 해결하는 건 언제나 가장 쉬운 방법일 뿐이다. 돈으로 안 되는 게 있다면 돈이 부족한 걸 수도 있지만 돈이라는 쉬운 길 이외에 조금은 어려운 다른 길이 있음을 의미하는 걸지도 모른다. 엘리엇은 아마 이걸 몰랐기에 돈으로만 주민들을 도왔을 것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돈으로 해결하는 것은 한 개인에게 어떠한 성찰도 남기지 못하는 법이다.
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항상 돈이 부족했기에 어려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내 삶에서 돈은 항상 목표가 아닌 수단에 불과했다. 물론 나도 돈이 많기를 바란다. 안타깝게도 내 나라의 사회복지 시스템은 그다지 훌륭하지 않아 노후가 불안정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직은 기계가 완전히 인간을 대체하진 못했다. 그럼에도 이미 노동은 상당히 하찮아졌다. 하지만 세상 모두가 나의 노동을 무시하더라도 오직 나만큼은 나의 밥벌이를 존중할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내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평생 둘러본 적 없는 진주 목걸이가 앞으로도 영원히 내 목에 둘러지지 않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