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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May 08. 2022

영화 <스프링 블라썸(2020)> 리뷰

극대화된 첫사랑의 낭만



얼마 전 극장에서 영화 <스프링 블라썸>의 예고를 보았다. 내 흥미를 자극한 건 트레일러 속 짧게 스쳐 지나간 안무 영상이었다. 사랑이란 감정을 대사로써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몸짓이라는 은유를 사용한 것이 제법 전위적이지 않은가 생각했던 것이다. <사랑은 부엉부엉(2016)> 등에서 보여준 프랑스 영화 다운 참신함에 대한 기대감도 물론 있었겠지만, 아무튼, 이런 이유로 영화를 감상하게 됐다.


일단 영화 외적인 것을 짤막하게 이야기하자면, 이 작품은 수잔 랭동 감독의 데뷔작이다. 하지만 그저 감독이라고 부르고 넘어가기엔 찝찝하다. 만일 <스프링 블라썸>이 하나의 음악이었다면, 수잔 랭동은 원 맨 밴드라는 말을 들었을 테니. 그는 포스터에서도 알 수 있듯 주연배우를 맡았고, 각본을 쓴 사람이기도 하며, 엔딩 크레딧곡마저 직접 불렀다. 그야말로 영화계의 루키다. 다만 영화 각본을 쓰기 시작한 것이 15살이며 자전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 다시 말하자면, <스프링 블라썸>은 결과적으로 첫사랑의 시작과 끝을 다루면서도 첫사랑을 회고하는 데에서 나오는 쌉싸름함이나 약간의 안타까움이 누락되어 있으며, 주인공 수잔(수잔 랭동)이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묘사는 퍽 서툴다. 그래서인지 <스프링 블라썸>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의 라이트한 버전에 가까워보인다.


※ 스포일러 주의


<스프링 블라썸>이 포착하고자 한 것은 삶의 한 순간이다. 따분한 일상이 급작스레 반짝이게 되는 어떤 순간. 이야기는 학교와 집, 관심사가 맞지 않는 주변인과 같은 일상에 질린 주인공 수잔의 눈에 우연히 연극 배우 라파엘(아르노 발로아)이 들어오는 순간 시작된다. 라파엘이 일하는 극장이 수잔이 좋아하는 하교길에 있다보니 둘의 동선은 거듭 겹친다. 자꾸만 시야에 들어오는 알 수 없는 남자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된 수잔은 점차 그의 영역에 자신을 들여보내고, 안면을 트며, 함께하는 시간을 늘려간다.


두 사람의 관심사는 꽤 비슷한 구석이 있지만, 수잔과 라파엘이 가장 크게 공통점을 느낀 부분은 권태로움이다. 다만, 수잔과 라파엘의 권태는 겉으로는 비슷해 보일지언정 속사정이 꽤 다르다. 작품이 재현하는 수잔의 권태는 기실 수잔이라는 인물의 자아/독특함을 부각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예컨대 수잔의 대사, "나는 또래 남자애들이 따분해요"는, 기실, 자신의 특별함을 인지하는 상대의 부재에서 비롯된 불만이다. 그가 말하는 '남자애들'은 보다 정확히 말하면 또래 전체를 뜻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그는 여자 친구들과의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파티에서 어울리지 못하며, 수업 시간 중 수준 낮은 질문을 하는 친구에게 큰 애정을 베풀지 않는다. 즉 수잔이 겪는 일상의 무료함은 평균적인 또래 집단과 수잔 본인의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영화는 해석한다. 


반면 라파엘이 겪는 권태로움은 일종의 번아웃으로 보인다. 같은 배역이 반복됨으로써 작품을 계속하고픈 열정이 희미해진 시간만이 지속되고 있다. 넌덜머리가 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가슴을 뛰게 하는 오페라 아리아곡과 같은 작은 요소에 기대어 일상을 이어나간다. 이런 순간 만난 사람이 바로 수잔이다.



수잔 랭동 감독은 <스프링 블라썸>을 찍는 동안, '러브 스토리 자체보다 사랑에 빠지는 감정에 더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명확하게 두 사람의 관계가 발전하는 모습을 끊김없이 그리기보단 감각적인 연출을 통해 두 사람의 흔들리는 감정을 충실하게 묘사한다. 속절없이 라파엘에게로 향하는 수잔의 시선이나, 잠들지 못하는 새벽 따위의, 사랑에 휩싸인 선명한 순간을 꾸밈없이 모아둔 것 같단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의 두 주인공은 (첫)사랑의 열병에 빠져 일상의 리듬을 잃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그토록 지난한 일상이었음에도 그것을 완전히 망가뜨리지 않으며 특별한 순간을 공유한다. 두 사람은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무엇인지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플라토닉적 관계에 기초한 둘의 감정은 일상을 조금쯤 살 만한 것으로 변화시킨다. 이렇듯 기존의 로맨스와 다른 문법을 사용하기 때문일까. 감독은 두 사람의 교감을 무용 시퀀스를 차용하여 표현하였다. 트레일러에서 보았던 장면이었음에도 영화를 통해서 만난 카페 씬은 두 사람의 감정을 그저 사랑이라는 단어로 재단하기엔 너무 얕지 않은지, 인간이 맺는 무수한 관계를 고작 몇 개의 단어로 가두는 것이 정당한지에 대해 생각하게 될 만큼 훌륭했다.




영화의 모든 장면은 놀라우리만큼 감각적이었으나 이외 부분에 있어선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군데군데 있었다. 자전적인 내용이라 하더라도 수잔을 제외한 주변인은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담겨 영화의 설득력이 반감된다는 점이나, 또래 집단과 수잔의 다름을 표현하는 데에 보다 적절한 소재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 등이 이에 해당한다. 특히 첫사랑으로 인해 생기는 주인공의 변화는 다소 이율배반적인 면모가 있어 수잔의 스탠스가 흔들릴 만한 상황이었음에도 조금의 고민과 주저함이 없었던 점이 퍽 아쉬웠다. 사랑은 일상을 반짝이게 수놓기도 하지만, 수놓는 사람을 바꾸는 것이기도 하니까. 수잔이 경험한 변화를 한 두 발짝 물러나 깊이 있게 묘사했다면 보다 좋았을 듯 하다.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 수잔 랭동을 알게 된 건 분명 큰 기쁨이었다. 그가 펼쳐보일 또다른 시네마를 기대해본다. 그때 즈음엔 <스프링 블라썸>이 내게도 첫사랑처럼 남을 지도 모른다. 어설퍼보이더라도 훗날 돌이켜보았을 때엔 결코 지울 수 없는 역사로 남고야 마는 첫사랑처럼.



★★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한 후, 주관적 견해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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