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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테리 Jun 04. 2021

부끄러움에 대하여.

tv 청문회를 보면 증인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대사가 있다.


“부끄럽지도 않아요?.” “사람이 말이야.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그런데 내가 궁금한 것은 심문을 당하는 증인 쪽이 아니다. 거칠게 상대를 몰아세우는 달변의 의원 쪽이다. 저분은 부끄러운 기억이 없어서 저렇게 당당하게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정말로 진실로 궁금하다. 나만 쓰레기인 건지. 나만 부끄러운 기억 투성인 건지.


한 사람, 한 사람의  24시를 팔로우해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면 어느 누가 한치의 부족함도 없이 성스러울 수 있을지 의문이다. ‘타인에게 보일 때의 나’와 ‘혼자 있을 때의 나’가 일관될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말이다. 있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의 발에 입을 맞추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고 싶다.  

  


나는 인간이면 누구나 다중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지적인 사람이 동시에 퇴폐적일 수도 있으며 어벙한 사람이 지혜로울 수도 있고 선한 사람이 악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한 단면만 보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판가름하는 건 사실 대단히 조심스러운 일이다.    


간혹, 살인자의 가족이나 이웃을 인터뷰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말이 있다.


“그럴 사람이 아닌데.” “ 얼마나 순했는데요” 따위의 말들이다.


그럴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 누구라도 그럴 수도 있는 사람이다. 한없이 순하다는 말은 얼마든지 포악해질 여지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은 안 변한다는 말이 있지만 사람만큼 잘 변하는 종족도 없다.    


나 역시 크게 튀지 않는 무난한 성격의 소유자로 얼핏 보이기도 하지만 돌아보면 부끄러운 기억 투성이다.    

어렸을 때는 나의 신체가 드러나는 것에 부끄러움을 많이 느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나는 엄마를 닮아 오리궁둥이였고 아버지를 닮아 다리가 살짝 o다리였다. 스스로 저주받은 하체라고 생각할 만큼 내게는 콤플렉스였고 셔츠를 쉽사리 바지 안에 넣어 입지 못했다. 또 아토피가 있어서 늘 팔을 가리기 바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갑자기 난 여드름을 엄마가 짜주는 바람에 깊게 흉터가 생겼는데 아무리 레이저 시술을 받아도 흉터가 호전되지 않아 늘 머리로 양쪽 이마를 가리곤 했었다.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그런 부끄러움엔 무뎌지고 마음이 드러나는 것에 오히려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괜히 원치 않는 모습으로 비칠까 봐 마음을 돌이키기도 하고 나의 답 없는 인생을 속으로 어떻게 생각할까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그런 모든 것들이 어떻게 보일까 조바심 내며 사는 나의 꼴이 우스워 또 한 번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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