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현우 시집 『나의 9월은 너의 3월』을 기다린 시간
주체와 타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만남도 그러할 것이다. 만남은 다른 두 개별적 타자들을 하나의 동일한 주체로 융합시켜주는 사태가 아니라, 각자의 고독을 상기시키는 간극을 계속해서 보존함으로써 유지될 수 있는"감각의 시간"을 새로운 만남의 풍경으로 다시, 가시화하는 일이다.
- 강동호 <다시 만날 세계> (구현우 시집 『나의 9월은 너의 3월』 해설) 중에서
지난했던 장마의 끝자락, 보슬비가 작별인사처럼 내리고 있었다. 나는 이대역 7번 출구를 빠져나와 골목의 골목을 누벼가며 길을 찾고 있었다. 여기가 맞나,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데 하던 차에 빌라들 사이로 빛나는 작은 간판이 보였다. 이름처럼 숨어있는 <비밀기지>는 주로 문학행사를 진행하는 조그만 지하공간이다. 발아래 난 창문 너머로 A4용지 더미를 정리하고 있는 현우 씨 얼굴이 보였다. 파마했네.
나는 4년 전 현우 씨에게 작사 수업을 들었다. 이름도 귀여웠지, <노랫말학교>. 그는 아는 사람만 아는 시인이자, 알 만한 대중가요의 가사를 쓰는 작사가였다. 글을 쓰고는 싶었지만 하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던 당시의 나는 집을 잃은 짐승처럼 작사 수업까지 둥둥 떠내려와 있었다. 대학원을 갔었지만 연구는 적성에 맞지 않았고, 비평을 하고 싶었지만 좀체 내공이 쌓이지 않았다. 매일같이 쓰고 싶다고 외쳤지만, '무엇을?'하고 물어보면 말문이 막히던 시절이었다.
어딘가에 두고 와 잃어버린 우산이 있다/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랬다/잃어버린 우산은 전부 멀쩡했지만/거리에서나 도보 어딘가에서/예기치 않게 발견된 우산은 빠짐없이 망가져 있었다
- <우리의 서른은 후쿠오카의 여름> 중에서
<노랫말학교>는 부정할 수 없이 유치한 이름이었지만, 현우 씨는 그곳에 어울리는 교장선생님이었다. 기술에 앞서 감각을 말하고 트렌드에 앞서 개성을 강조했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을 알려주고 함께 찾아주는 선생님이었다. 나와 12명의 수강생들은 자기 말로 된 몇 편의 노래를 가지게 되었다. 현우 씨는 수업 이후 작사 모임을 먼저 나서서 조직해주고 후원해주었다. 마지막 수업 때 그는 수강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시집을 골라 선물했다. 나는 안태운의 『감은 눈이 내 얼굴을』을 받아 들고 얼마간 마음이 헛헛했다. 현우 씨는 내가 길을 잃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물린 데가 없는데도/말할 수 없는 어느 부위가/참을 수 없이 가려웠다//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고 아무것도 끝난 것 없어서…예술이 있는 정원을 벗어나고도 나의 서사는 정원의 일부였고 하나의 그늘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으니까//그만두는 일은 죽는 일이었다…도중에 네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 <공중정원> 중에서
작사 모임이 이어지지 못한 건 내 탓이었다. 애초 가장 적극적이었던 내가 갑자기 모임에 빠지는 일이 반복되면서 서너 명밖에 되지 않던 모임은 자연스럽게 와해되었다. 당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음에도 아무런 대가 없이 우리의 작업물을 피드백해주던 현우 씨에게는 사과할 용기도 내지 못했다. 그 전과 후에도 나는 도망치는 일이 잦았지만, 그때는 마음이 터질 곳도 없이 꽉 막혀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어려운 기억에서 차츰 멀어질 때쯤, 현우 씨의 첫 시집 발간 소식을 들었다. 수업 때도 시집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었으니까, 그도 거기까지 가는 데 3,4년이 걸린 셈이다. 나는 현우 씨의 3년을 생각하며 시집을 열었다. 거기에는 이전 세대의 무엇으로부터 결별한 것처럼 한 발짝 물러선 시들이 있었다. 그러면서 이래도 괜찮다고 말하는 시들이었다. 나와 너는 별개라고 말하는 노래였다.
마주보지 않는 새벽 오늘날의 명백한 아침을 인정하지 않는다. 같은 버스가 연달아 온다. 나는 네 못난 꼴을 보고 싶었을 뿐이야 아마도 내가 말한다.//그러니까 너는 좋은 사람이란 거야//어쩌면 네가 대답한다. 괜찮을 리 없는 나의 그늘이 괜찮다고 믿어 완치가 불가능한 너의 그림자를 뜯어먹고 있다. 사이프러스 뒤에서 너는 겨울을 나는 그전 해의 겨울을 지나고 있다.
- <그러니까 좋은 사람> 중에서
현우 씨와 나는 사적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고, 작사 모임이 끝난 뒤에 연락을 해본 적도 없다. 하지만 시인의 노래와 시집에서 나는 잔잔하지만 단단한 연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너와 나는 각자의 자리에 있고 서로 다른 곳을 향해 가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만날 것이다. 그것으로 좋지 않은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거리를 내어줌으로써 위로와 감사를 전할 수 있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
그날 내가 <비밀기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현우 씨와 나는 한눈에 서로를 알아봤고 몇 마디 안부를 주고받았다. 미안했다고 고마웠다고 짤막하게 말했다. 현우 씨는 <비밀기지>의 기획자로서 수업 준비를 위해 다시 분주해졌고, 나는 신청한 소설 수업을 들으려고 노트를 꺼냈다. 그것으로 좋았다. 동그란 무언가가 <비밀기지> 안을 떠다니고 있었다.
나의 9월은 너의 3월//선유도에서 만나자 선유도에는/직접 본 다음에야 알게 되는 게 있으니까
- <선유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