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너의 결혼식
영화배우 박보영과 김영광이 주연한 첫사랑의 아련함을 담은 영화 너의 결혼식에서 주인공인 김영광은 반복되는 취업의 실패와 좌절 속에서 친구 옥근남에게 말한다.
요샌 내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내가 멀 좋아하는지 심지어 내가 누군지조차
잘 모르겠어.
이때 이야기를 잠잠히 듣고 있던 주인공의 절친인 옥근남은 좌절감에 빠져 삶의 방향을 읽어버린 친구에게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답한다.
야, 나도 취업하기 전까지 자소서를 수십 개 썼는데 다 내가 아니야.
어떤 자소서에서는 이걸 좋아한다고 했다가 다른 데에서는
저걸 좋아한다고 하고, 자소서마다 장점이랑 단점도 다 달라.
나도 자소서를 쓰는데 머가 나인 줄 모르겠어. 취업해도 다 똑같아.
흔한 말로 웃기지만 슬픈, 웃픈 상황이 이와 같지 않을까?
하지만 더 슬픈 사실은 이 영화의 대사가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취업을 위해 수많은 자기소개서를 쓴다.
그런데 정말 수십 개에 달하는 자기를 소개하는 자소서 속에 과연 진짜 나는 얼마나 있을까?
누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들에게 나와서 자기소개를 하라고 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이 나온 학교, 다니는 직장, 사는 곳 등만을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이런 것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조건은 될 수는 있어도 진정한 ‘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최근의 자소서 추세 또한 단순히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나 조건에 대한 소개보다는 자신이 살면서 경험한 나만의 이야기를 쓰라고 하는 곳이 많다. 예를 들면 어려운 상황이나 힘든 시기를 극복하고 이겨낸 나의 이야기를 써보라는 것 등이다.
그런데 꼭 어려운 상황이나 힘든 시기가 찾아왔을 때 그 시기를 극복해야지만 우린 좋은 인간이 되는 걸까? 솔직히 정말 내 삶에 힘들고 어려운 시기가 왔을 때 모든 걸 포기하고 도망가고 싶은 적이 더 많지 않던가? 내가 극복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이 없어 칠흑 같이 어두운 시간의 밤을 버티다 보니 그 순간이 지나가 있던 적이 더 많지 않던가?
하지만 정작 우린 그런 솔직한 나의 이야기를 자소서에 담아낼 수 없다. 그건 그들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니까. 그래서 우린 나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들이 원하는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는 한다. 그리고 그렇게 수십 통 아니 수백 통의 자소서를 쓰다 보면 어느새 우린 영화 속 옥근남의 말처럼 진짜 내가 누구인지 점차 잃어간다.
실제로 여러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것을 왜 좋아하는지, 어떤 때 우울해하고 어떤 때 즐거워하는지, 무슨 일을 할 때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몰입을 하고, 자신의 열정을 쏟아붓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저 딱 두 가지로 표현할 뿐이다. ‘좋아요. 싫어요.’
하지만 ‘나’라는 사람은 그렇게 ‘좋다, 싫다’ 두 가지로 구분 지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사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나’를 잘 안다는 것은 단순히 나에 대한 정보를 나열하고 정리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를 잘 알 때 우린 나에게 ‘더 나은 삶’과 ‘만족스러운 삶’ 그리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실제로 자신이 하는 일과 직업에 만족도가 높은 사람들은 대부분 ‘나’에 대해서도 잘 아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나’를 잘 알아야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직업을 가질 때 만족한 삶을 살 수 있는지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직업 만족도와 행복도가 높은 북유럽의 국가들을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다. 덴마크와 스웨덴을 포함한 북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학교교육의 초점이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일과 자신이 만족하는 일,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들을 찾는 것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교육의 목적이 어떠한 직업을 가지고 어떤 직장에 들어가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기쁘고 만족하는 지를 찾는 '나'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요즈음 들어 우리나라의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도 이런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
단지 그 나이 때가 조금 늦을 뿐이다. 오늘날 한국 청년들은 평균적으로 28-30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만족하는 일이 무엇인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고민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나이 때가 평균적으로 첫 직장에 들어가 1년에서 2년 정도를 보내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대게 한국의 청소년과 청년들은 이 시기 전까지는 한 번도 나에 대해 돌아볼 틈 없이 그저 자신들을 향해 수없이 쏟아지는 일방적인 메시지를 쫓아 살아간다.
‘대학만 가면 행복할 거야. 취업만 하면 걱정 끝이야.
직장에만 들어가면 머든 다 할 수 있어.’
라는 말에 속아 앞만 보며 달려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취업을 한 후 1-2년을 보내면서 정작 내가 원하는 삶은 이게 아니었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된다. 그리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늦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책상에 앉아 남이 원하는, 다른 사람을 위한 자기소개서가 아닌 진짜 나를 소개하는 자기소개서를 써보자.
적어도 나는 누군가 나에게 소개 좀 해주세요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소개해볼까 한다.
저는 유쾌하고 밝은 사람입니다. 카페에 앉아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지만 또 어떤 때는 사람들을 그리워하기도 하죠. 카페에 앉아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때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하고 저의 감정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사색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인사이트 들을 얻기도 합니다.
제가 힘들어하는 순간은 문득문득 저에게 찾아오는 막연한 우울함과 그리움입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가끔 그런 시간들이 있잖아요. 사람들과의 관계는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조금씩 적응되지만 그런 감정의 순간들은 쉽게 적응이 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더 힘든가 봐요.
그래도 저는 그런 저를 사랑해요.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니까요. 이게 저라는 사람이에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