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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휘찬 Sep 02. 2021

8월의 기록

2021년 8월

#12권의 책, 1편의 영화


8월의 초반은 계단을 오르는 듯했다. 하루하루 루틴이 잘 지켜지고, 그 안에서 해야 할 일들과 하고 싶은 일들을 적절하게 조절하며 해나갔다. 평온했고, 안정적이었다. 한 가지를 해내면 그만큼씩 성장하는 것 같았다. 사실 성장한다고 느끼는 것은 육체적 성장이 멈춘 이후로 정신적인 영역에서 조차 느끼기 어려운 일이다. 분명히 우리는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지만,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한계를 짓는지도 모르겠다. 초반의 안정적인 페이스와는 다르게 중후반이 되면서 점점 변수들이 많아졌다. 루틴은 자주 깨졌고, 깨진 루틴 사이로 시간은 빠르게 흘러나갔다. 그렇게 8월은 지나갔다. 그래서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영화나 꾸준히 봐야 하는 드라마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래서 8월에 읽은 책의 대부분은 초반에 읽은 것들이다. 후반에 루틴을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했으나,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고 이때 시작한 책들의 대부분은 9월로 이월되었다.  8월 초반의 안정감도 이월되길 바란다. 8월에 읽은 책 중에 가장 좋았던 책은 <시와 산책>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워낙 여러 사람들이 추천했던 책이라 기대감이 컸는데, 기대 이상으로 더 좋았다. 나중에 읽고 싶어서 아껴뒀던 마음도 있었지만, 이제는 연말쯤 다시 한번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상, 산책 그리고 거기서 피어오르는 작은 생각과 그에 맞는 시 구절까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작품이었다. 두고두고 음미할 문장이 많은데 그중 하나를 여기에 기록해 두고 싶다. 


"

겨울을 겨울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당연한 듯해도, 

돌이켜보면 그런 시선을 갖지 못한 적이 더 많다.

봄의 마음으로 겨울을 보면, 겨울은 춥고 비참하고 공허하며

어서 사라져야 할 계절이다.

그러나 조급 해한들,

겨울은 겨울의 시간을 다 채우고서야 한동안 떠날 것이다.

고통이 그런 것처럼.


-추운 계절의 시작을 믿어보자 中, <시와 산책>, 한정원, 시간의 흐름, 2020 -


#SNS 다이어트


한동안 열심히 인스타그램을 관리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의 근황을 열심히 업데이트했다. 지나가버리면 붙잡을 수 없는 소소한 일상을 잡아두고 기록하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하게 되어서, 방문한 장소와 그곳에서의 나의 모습을 위주로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했다. 언젠가 '내가 5월에 뭘 했지'라는 생각이 들 때 들춰보면 굵직굵직한 일들은 기억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기록된 인스타그램의 피드를 보니 나는 언제나 멋진 곳에 다니고, 이쁜 카페에 다니며 그곳에서 행복해하는 모습만 박제되어 있었다. 그 사이사이의 나는 많은 생각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괴로움에 잠 못 이루는 날도 있었지만 그런 건 인스타그램에 전혀 없었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만 남겨두는 기능. 오히려 그런 점이 인스타그램의 장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한동안 열심히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다 보니, 오래간만에 연락을 하게 된 지인들에게 '요즘 잘 지내더라.', '잘 놀러 다니더라.'라는 소리를 심심치 않게 듣는다. 굳이 따로 연락해서 '잘 지내니', '요즘 뭐하니.' 같은 안부를 물을 필요가 없더라나. 그 말 앞에서 나는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과 사진 사이의 나에 대해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알게 되었다. 나 역시 그런 모습으로 보이고 싶었다는 것을. 걱정 없이 언제나 행복하고 밝은 모습, 좋은 곳에서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는 모습, 나 자신에게 충실한 모습. 그것이 나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인스타그램에서만큼은 그런 사람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8월에는 'SNS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언제 다시 인스타에 일상을 업로드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업로드를 중단했고, 인스타그램에 접속하는 횟수를 많이 줄였다. 누군가의 소소한 일상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으나, 어느샌가 소소한 일상인 척 광고를 하는 경우가 많았고, 때로는 누군가의 과도한 업로드로 알고 싶지 않은 타인의 사생활을 봐야 할 때도 있었다. 사적인 대화의 캡처부터, 노골적인 자랑, 개인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부끄러운 줄 모르고 올려대는 여러 사진들 (특히 스토리)때문에 괴로웠던 적이 많았는데 그것으로부터 꽤 많이 자유로워진 것 같다. SNS도 다이어트가 필요했다.


#여름의 끝자락


지난달, 전기 고지서를 받고 놀랬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에어컨을 많이 켰고 그래서 그런지 역대 최고의 금액이 찍혀있었다. 대신 교통비는 줄었으니 결국은 집에 오래 머문 값지불 같은건가 싶다. 타 죽을 것 같아서 감히 외출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더위가 입추, 말복을 기점으로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아침 일찍 나가도 숨이 막힐 것 같았는데, 이제는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선선해졌다. 매년, 매계 절 느끼지만 자연의 시간계획이 딱딱 맞아떨어진다는 게 참 신기하다. 하지만 올해는 장마가 2번이라는 특별한 해를 보내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비 오는 걸 좋아하는데 (특히 집에 있을 때 비 오는 날) 그중에서도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이 쏟아지는 비가 좋다. 그리고 밤새도록 무섭게 쏟아지던 비가 그친 다음 미세먼지가 모두 씻겨나간 맑은 하늘이 좋다. 하지만 여름의 끝자락에 다시 시작된 장마는 그렇지가 않았다. 비가 그치면 또 비가 오고, 다시 그친다 싶으면 잔뜩 흐리다가 또 비가 오고 하는 전형적인 장마였다. 창문을 열어도 찐득하고 눅눅한 공기가 방충망 사이로 밀려들어왔다. 집에 오래 머문 탓도 있지만 쨍쨍한 햇빛을 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날씨가 기분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나의 에너지도 뽀송뽀송하지가 않고 꿉꿉하기만 하다. 젖은 나무는 불이 잘 붙지 않고, 매캐한 연기만 더 날 뿐이다. 김동률의 <여름의 끝자락>을 들으며 눅눅한 장마가 얼른 끝나기를 기다려본다. 비록 이 장마가 끝나면 여름도 끝나버리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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