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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ia Jan 19. 2019

문명과 행복의 상관관계

[쉼표에서 발견한 것들] 02. 와라스에 도착하다

공항을 나서자 택시 기사들이 ‘세뇨리따’, ‘레이디’ 등의 단어를 부르며 다가왔다. 남미 택시는 바가지요금과 강도로 악명이 높아서 진즉에 우버를 불러둔 터였다.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기사들은 호객 행위에 열심이다. 눈빛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득달같이 달려들 걸 알기에 앞만 보고 걸었다. 부름에 응하지 않는 것은 매정한 일이다. 하지만 여행지에서는 적당히 매정해져야 귀찮은 일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다.


장녀 콤플렉스, 아직 내겐 어려운 일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터미널은 한산했다. 남미에서는 조심 또 조심하라는 이야기가 떠올라 배낭을 앞으로 고쳐 매고 양손으로 캐리어 손잡이를 잡았다. 매표창구에 예매내용이 적힌 종이를 내밀자 직원이 스페인어로 뭐라 말을 했다. 내가 “No español.”이라고 말하자 그녀의 얼굴이 벌게졌다. 당황한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내게 기다리라는 손짓을 한 후 다른 직원을 불러왔다. 바뀐 직원은 영어로 버스 탑승구 위치와 터미널 세 납부 방법을 설명했다. 내가 못 알아들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건지 친절하게 종이에 숫자를 적고 그림까지 그려주었다. 자기 할 말만 하고 눈빛을 거두었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페루에서는 같은 행선지라고 해도 회사별로 티켓을 따로 판매한다. 나는 비싸지만 '비교적' 안전하고 좌석이 편하다는 크루즈델수르에서 와라스행 버스 티켓을 구매했다.


처음에 당황했던 직원은 일이 잘 풀려 기분이 좋았던 건지 환하게 웃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문득 일터에서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장녀 콤플렉스 영향인지, 나는 보통 업무를 맡게 되면 그것에 수반하는 모든 일을 내가 다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끙끙 싸맨 채 허덕이다가, 일의 결과가 좋지 않거나 누군가에게 업무를 덜어주게 되면 자괴감이 하늘을 찌르고 자존감은 땅을 파고 들어간다. 대화를 나누다가 모르는 내용이 나오면, 그 사실이 창피해 대충 아는 척을 하고 나중에 인터넷으로 찾아본 적도 있다. 누군가 내게 실망하는 게 두렵다. 내 몫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때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만약 터미널의 그 직원과 같은 상황을 마주했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일의 해결 여부를 떠나 ‘왜 영어를 못할까’하고 자책했겠지. 슬프지만 사실이다. 그녀처럼 환히 웃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모르면 물어보고 못하면 도움을 요청하면 된다는 것, 잘 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낼 수는 없으니까. 책임과 모든 일을 감당하는 게 같은 의미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나에겐 아직 어려운 일이다.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고 해도.


맞이방 풍경.
각 탑승구에는 버스 출도착 상황을 알려주는 모니터가 부착되어 있다. 하지만 남미에서 정시출발을 기대하는 것은 사치다. 이날 와라스행 버스도 30여 분 늦게 출발했다.


페루는 무지개다


버스의 2층 맨 앞 좌석에 앉은 덕분에 리마에서 와라스로 가는 동안 다양한 풍경을 정면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사막, 사구, 바다, 울창한 숲, 바위산 등의 다양한 풍광이 눈앞에 펼쳐졌다. 날씨도 변화무쌍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가 싶더니 갑자기 비가 오고 다시 맑아졌다가 흐려지는 현상이 반복됐다.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인디헤나(원주민)의 의상과 건물 역시 화려하고 다양한 색감을 뽐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알록달록하고 다채로운 이곳. 누군가 내게 페루의 첫인상을 묻는다면 ‘무지개’라고 답할 것 같다.


와라스로 가는 길.
와라스로 가는 길.
와라스로 가는 길.
와라스로 가는 길.
높은 등급의 버스와 좌석을 선택하면 차내식(?)이 나온다. 무려 메뉴를 선택할 수도 있다. 나는 소고기를 골랐는데, 누린내가 많이 나서 대부분 남겼다.
차내식(?)과 함께 나온 잉카콜라. 페루의 국민 음료다. 불량음료 같은 맛과 색 때문에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 내 취향에는 잘 맞았다.


와라스는 해발 3000m가 넘는 곳이다. 주민의 일상이 펼쳐지는 공간이 한국에서 제일 높다는 백두산(해발 2750m)보다도 더 높은 것이다. 버스는 계속해서 안전대하나 없는 꼬불꼬불한 낭떠러지 길을 올랐다. 창밖을 보니 ‘헉’소리가 절로 나왔다. 2층에 앉아서 그런지 더 아찔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떨어져 죽으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이곳은 와라스!


문명과 행복은 비례하지 않다


늦은 시각, 와라스의 거리는 복잡했다. 인도와 차도가 선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다들 그 선을 넘나들며 없는 것처럼 여기는 듯했다. 인도와 차도 위로 말이나 닭 등의 동물이 지나가기도 했다. 때문에 조금 위험해보이고 교통체증도 심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인상을 찌푸리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모두 느긋한 표정으로 길을 걷거나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미간과 이마에 주름이 가득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여유 가득한 주민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묘한 감정이 일었다. 감히 이 광경을 ‘미개하다’라거나 ‘불편하다’라고 평할 수 있을까?


그리 오래되지 않은 때에, 우리도 그들과 비슷한 길을 걸은 적이 있다. 고도성장으로 눈부신 발전을 일궜지만, 그것이 더 큰 행복을 가져다줬다고 말할 수 있을까? GDP, GNP 등의 경제 수치만 놓고 보면 한국은 페루보다 훨씬 더 잘 사는 국가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문명, 발전 따위의 것들은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와라스의 거리. 노을이 참 예쁘다.


공산품은 마트에서, 과일과 고기는 노점에서


숙소 주인 내외는 친절했지만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덕분에 체크인 과정에서 꽤 애를 먹었다. 전 세계인의 공용어라는 보디랭귀지도 한계가 있었다. 번역 애플리케이션과 아는 스페인어 단어를 활용해 체크인을 겨우 마쳤다.


이후 Trujillo라는 마트에서 과자와 우유 등을 샀다. 어두운 길을 걸었지만 예상보다 덜 위험한 느낌을 받았다. 숙소 근처 노점에서 바나나도 샀다. 참, 이곳 마트에서는 채소, 과일, 육류 등을 구할 수 없다. 철저히 공산품 위주의 상품만 판매한다. 농수축산물은 개인 상점이나 노점에서 살 수 있다. 숙소 계단을 오르며 ‘상생’, ‘같이 산다는 것’, ‘함께’ 따위의 말들을 떠올렸다.


마트와 노점에서 산 것들. 바나나는 저 정도 양이 한국 돈으로 350원밖에 안 한다. 싱싱하고 맛도 좋다!


마음대로 되면 인생이 아니지!


무려 60시간 만의 샤워였다. 씻고 침대에 누우니 긴장이 풀려 스르르 눈이 감겼다. 동행하기로 한 분들께 연락이 왔다. 에콰도르와 페루 국경을 넘는 중인데, 내일 아침에 와라스에 도착할 것 같단다. 혼자서도 빨빨거리고 잘 다니지만, ‘위험하니 꼭 동행을 구하라’는 지인의 성화에 못 이겨 일부 구간 동행을 구해둔 터였다. 그분들 덕분일까. 조금은 든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벌어질 일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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