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에서 발견한 것들] 01. 페루로 가는 길
페루 리마에 왔다. 홍콩과 미국 댈러스를 경유했는데, 총 서른 시간이 넘는 꽤 힘든 비행이었다. 미국 입국 심사가 까다롭다기에 긴장을 잔뜩 했지만 의외로 별거 없었다. “어디 가니?”, “페루로 여행하는 중이야.”, “페루는 왜?” 여기서 살짝 당황하긴 했다. 분명 여행한다고 말했는데 왜 다시 목적을 묻는 거지? 소심해져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traveling.”이라고 답했다. 심사관은 얇은 미소를 보이더니 여권에 정말 '쾅' 소리가 나게 입국 도장을 찍어주었다.
수월하게 미국 입국 심사를 통과했기에 이제 아무 걱정 없이 리마로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한국-홍콩 구간은 캐세이퍼시픽을, 그 외 구간은 모두 아메리칸에어라인을 이용했다. 인천에서 탑승권을 발권할 때 캐세이퍼시픽 직원이 '댈러스에서 위탁 수화물이 잘 연결되는지 꼭 확인하라'고 했다. 미국은 보안 검색이 까다롭기 때문에 짐을 꼼꼼하게 살핀단다. 미국 국내를 경유하는 것이 아니라 위탁 수화물이 자동 연결될 수도 있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꼭 확인해보라고 했다. 자칫하면 내 짐이 리마로 가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불안한 마음에 홍콩 공항에서 아메리칸에어라인 카운터를 찾았다. 탑승권을 보여주고 짐의 최종 도착지를 물었다. 직원은 리마에서 찾으면 된다고 했다. 댈러스에 도착하고 보니 이상했다. 아메리칸에어라인 탑승객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위탁 수화물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애플리케이션에 따르면, 내 짐은 댈러스 공항까지 무사히 도착한 것으로 나왔다. 그런데, 리마행 항공기에 실렸다는 이야기가 없었다. 출발 시각이 다가오면 실리려나 했지만, 탑승 안내 방송이 나오는데도 애플리케이션의 내용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또다시' 불안한 마음에 '또다시' 아메리칸에어라인 카운터를 찾았다. 더듬더듬 아는 영어단어를 총동원해서 내 짐의 위치를 물었다. 직원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게 빠른 속도로 대답하더니 내게서 눈길을 거뒀다. 순간 서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곳은 미국인 것을. '될 대로 돼라'는 마음으로 항공기에 올랐다. 안 오면 기다리고, 잃어버리면 새로 사면 되지. 뭐.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는데 또다른 문제가 생겼다. 한국에서 구한 페루 유심칩을 스마트폰에 장착하려다가 원래 꽂혀있던 유심칩을 바닥에 떨어뜨린 것이다. 쿠바 여행 때는 여행 첫날에 스마트폰 소매치기를 당하더니, 이번에는 유심칩 분실이다. '나는 여행할 때 스마트폰을 들고 오면 안 되나 봐', '혼자 여행할 때는 왜 매번 초반부터 꼬이는 거지' 등 오만가지 부정적인 생각이 벌떼처럼 머릿속으로 몰려들었다. 이코노미석의 좁은 좌석 배치 덕에 고개를 숙이고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발만 동동 굴렀다. 난기류에서 비행기 동체가 흔들릴 때마다 내 심장도 함께 흔들렸다. 장시간 비행에 피로가 잔뜩 쌓였는데도 유심칩 걱정에 눈을 붙일 수 없었다.
70시간 같던 7시간이 지나 리마에 도착했다. 옆자리 승객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무릎을 꿇고 의자 밑을 살폈다. 승무원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떻게 말할지 준비까지 해둔 터였다. 허무하게도 고개를 숙이자마자 유심칩이 보였다. 좌석 밑에서 아주 얌전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더라. 살펴보니 바닥에 카펫이 깔려있어 무언가를 떨어뜨려도 쉽게 구를 수 없는 구조였다. 사정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걱정부터 한 자신이 한심했다. 생각해보면 난 평소에도 그랬다. 무슨 일이 생기면 겁부터 났다. 늘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남들보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딘 경우가 많았다. 그럼 그렇지, 걱정쟁이가 어디 가겠나.
위탁 수화물 역시 우려했던 것과 달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리니 긴장이 풀렸다. 다리 힘도 빠졌다. 40시간 가까이 씻지 못했다는 사실도 자각했다. 찜찜한 기운이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하지만 버스를 8시간 더 타고 가야 첫 여행지인 와라스가 나온다. 한숨 돌릴 겸, 약간의 돈을 환전한 후 공항 내에 있는 스타벅스로 향했다. 페루에서만 먹을 수 있다는 루꾸마 프라푸치노를 주문했다. 색이 노랗길래 상큼한 맛을 기대했는데 텁텁한 식감을 자랑하는 음료였다. 루꾸마는 ‘잉카의 황금'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한 과일이라는데, 내 취향은 아닌 것으로.
음료를 다 마시고 와라스로 가는 크루즈델수르(고속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로 향했다. 입안 가득 꽤 오래 사라지지 않는 루꾸마 프라푸치노의 기운 때문인지 마음까지 텁텁해지는 것 같았다. 큰 탈은 없었지만 시작부터 찜찜한 이번 여행, 괜찮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