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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ia Jan 15. 2019

권태와 싸우기 위해 배낭을 메다

[쉼표에서 발견한 것들] 00. 프롤로그

살아있는 한 ‘영원한’ 마침표는 없다


10여 년 전 대입 원서를 쓸 때, 당시에는 이름조차 생소한 '서반아어과'에 지원하겠다고 했다. 사실 가고 싶던 학과는 아니었다. 내 꿈은 라디오 PD가 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보통의 수험생들이 그러하듯이 나 역시 점수에 맞춰 학교와 학과를 골랐다. 그중 서반아어과가 있었을 뿐이다. 또한 영어나 일본어 등은 배우는 사람이 많아 희소성이 떨어져 보였다. 내 의견을 들은 담임 선생님은 상향 지원을 권했고, 이에 응했던 나는 똑(!)하고 떨어지고야 말았다. 결과만 보면, 원하던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으니 다행인가 싶으면서도, 그때 서반아어과에 진학했다면 어땠을까 종종 상상해보곤 한다.


끝난 줄 알았던 스페인어와의 인연은 2016년 쿠바 여행을 하면서 다시 이어졌다. 마침표가 쉼표로 바뀐 것이다. 현지 언어를 알고 여행하는 것과 모르고 여행하는 것은 천지 차이라고 생각했던지라 독학으로 스페인어를 파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빈약한 의지가 감당하기에 독학은 굉장히 버거웠다. 결국 얼마 배우지 못한 채 포기하고 말았다. 쿠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 머릿속에 있는 스페인어라곤, 간단한 인사와 가격 흥정을 위한 숫자와 단어가 전부였다.


그렇게 또 마침표로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최근 다시 쉼표로 바뀌었다. 작년 11월의 남미여행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남미 땅을 밟았을 때 내 스페인어 실력은 쿠바에 갔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 여행이다. 그래서 얼마 전 스페인어 학원에 등록했다. 마침표가 언제 다시 쉼표로 바뀔지 모르니까.


쿠바의 흔한 기념품 중 하나. 가격 흥정은 필수다. 너무 비싸게 부른다 싶으면 '무이 까로'(Muy caro, 너무 비싸요)라고 말하면 된다.


우리는 너무 쉽게 놓아버린다


사실 고백하자면 ‘정말로’ 남미에 가게 될 줄 몰랐다.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근거와 출처 불명인 열병을 끊임없이 앓고 있었지만, 내가 발도장을 찍을 수 있는 곳은 쿠바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줄 알았다. 다만 평소에 “남미에 갈 것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정신 차려 보니 항공권을 끊고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더라. 무언가 이룬다는 것은, 희망, 바람, 소원 따위의 것들을 놓지 않는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을 너무 쉽게 놓아버린다.


나는 느긋하게 발 닿는 대로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지라 여행 계획을 촘촘하게 세우지 않는 편이다. 약 한 달 동안 페루, 볼리비아, 칠레 딱 3개 국가만 다녀오기로 했다. 비슷한 기간에 저 세 나라와 아르헨티나, 브라질까지 다녀온 사람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일정은 주요 관광지만 방문하고 바쁘게 이동했을 때 가능하다. 쉬엄쉬엄, 놀멍쉬멍을 좋아하는 나와는 잘 맞지 않았다.


여행지를 확정하고 관련 정보를 얻기 위해 여행자들이 모인 단체 채팅방에 들어갔다. 강도, 소매치기 등의 흉흉한 이야기가 오갔다. 살해 위협을 받았다는 이들도 있었다. 잘 알아보지 않으면 사기당하기 십상이란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 무언가를 더 챙기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누구는 여행계획 짤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데, 나에게는 굉장한 스트레스였다.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만 준비하는 데도 번거롭고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방받은 고산병약을 어디에 두었는지 잊어버려 종일 방안을 샅샅이 뒤진 적도 있고, 황열병 예방접종 부작용으로 한여름에 고열과 몸살에 시달렸으며, 볼리비아 비자 발급을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대사관으로 향한 적도 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집을 나서며 낮게 읊조렸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하지만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에서 본 별과 은하수는 최고의 부귀영화였다.


여행이 삶을 바꿀 수 있을까?


위험한 데다가 신경 쓰고 준비할 게 많아서 그랬던 걸까. 남미여행 소식을 들은 지인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대단하다’는 것. 그렇지 않다고, 별것 아니라고 대답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정말 그런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이 생각은 금세 산산조각이 났다. ‘한 달쯤이야’, ‘페루, 볼리비아, 칠레쯤이야’라고 여길 것 같은 여행 고수들의 숱한 사례를 접했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에서 난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 여행 역시, 우리 삶의 많은 것처럼 시각에 따라 달리 보였다.


여행이 삶을 바꿀 수 있을까? 나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것 같다. 여행지에서 어떻게 살겠다고 다짐해도, 당시뿐이거나 오래 못 가더라. 다만 낯선 곳에 자신을 가져다 두면, 그간 몰랐던 나만의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어쩔 수 없어. 나는 왜 이 모양일까’가 ‘나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구나’로 바뀌는 그 순간의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권태를 이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발견’이다.


그렇게 이번에도,

권태와 싸우기 위해 지구 반대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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