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에서 발견한 것들] 03. 여행 일정이 틀어질 때
엘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져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 걸요!
관점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는 '빨간 머리 앤'의 명대사다. 와라스에서의 둘째 날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을 '생각지도 못했던 일'로 전환하는 날이었다.
조식으로 빵과 오렌지주스, 다양한 차, 커피 등이 나왔다. 여기에 메뉴 하나를 추가 요금 없이 주문할 수 있었다. 햄이 들어간 스크램블에그를 주문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오렌지주스와 코카차를 마셨다. 오렌지주스는 물이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은 순도 100%의 착즙 주스였다. 과일이 흔해서 그런지 중남미에서는 생과일주스가 매우 싸다. 코카잎은 고산병에 좋다고 한다. 리마에 도착하자마자 아세타졸(고산병약)을 먹어서 고산 증세는 없었지만, 혹시 몰라 홀짝홀짝 코카차 한 잔을 다 마셨다. 생수병에 넣기 위한 티백도 따로 챙겨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스크램블에그는 햄을 꽤 많이 품고 있었다. 비주얼은 합격이었다. 한 수저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대부분의 중남미 음식이 그렇듯 매우 짰다. 입안 가득 퍼지는 소금기를 견딜 수 없어 오렌지주스를 들이켰다. 이번에는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버터와 우유가 안 들어갔나. 아무 맛이 나지 않는 데다가 퍽퍽해서 목이 멨다. '이걸 어떻게 먹지'라며 고민하고 있는데, 음식을 준비한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싱긋 웃는 그녀의 표정에 음식을 남길 수 없어 고민하다가 빵 사이에 버터를 바르고 스크램블에그를 넣었다. 오! 이러니 좀 낫구나. 스크램블에그와 빵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면서 괜찮은 맛을 냈다. 같이 먹는 이유가 있었다. 함께 하는 이유가 있었어. (참고로 다다음 날은 치즈가 들어간 스크램블에그를 먹었다. 치즈의 식감이 한국의 그것과 다르게 생소했다. 마치 마시멜로처럼 폭신폭신했다.)
다 먹지 못할 것 같던 조식을 깨끗이, 그리고 맛있게 해치우고 방에 들어와 외출 준비를 했다. 오늘은 와라스 시내를 둘러볼 참이다. 씻고 나가려는데 동행하려는 분들에게 메시지가 왔다. 어젯밤 메시지를 주고받다 끊겨서 기다리던 중이었다. 글쎄 이분들, 와라스가 아니라 리마로 갔단다. 순간 체한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국경 넘는 과정에서 베네수엘라 난민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었고, 와라스로 오는 막차를 놓쳤단다. 와라스행 버스는 밤에만 있어서 하루를 꼬박 기다려야 하는데, 시간 낭비인 것 같아 리마로 그냥 가버렸다는 거다. 당혹스럽고 짜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나보다 더 당황했을 그들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 터.
사실 혼자 다니는 건 어려운 게 아니다. 다만, 자꾸 어긋나는 일이 생기는 게 불안했다. 하지만 너무 마음 쓰지 않기로 했다. 우리네 삶은 매일 반복되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늘 약간의 변주가 더해진다. 여행지에서도 변주는 있기 마련이다. 다만 그 폭이 다를 뿐이다. 여행자들은 본인이 원하는 색과 방향에 맞춰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여러 돌발상황이 생기게 되고, 그 과정에서 다른 채도와 명도, 온도를 가진 색이 추가된다. 세심함이라고는 전혀 없는 나의 계획조차 틀어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번 여행에 다른 색이 더해진 것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무지개처럼 알록달록 다양한 색이 칠해질 수 있음에, 그래서 더 재미있고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될 수 있음에 감사하기로 했다.
해발 3000m의 와라스. 하늘이 너무 낮아 손을 뻗으면 구름이 잡힐 것 같았다. 쾌청한 날씨에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변덕 심한 남미 날씨답게 오후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빗소리는 꽤 굵직했다. 바닥을 때리는 소리도 남다르게 우렁찼다. 여행 중 만나는 비는 불청객이다. 때때로 일정을 흩트려 놓기도 하니까. 하지만 덤덤했다. 곧 해가 뜰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곧 맑게 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와라스 시내를 쉬지 않고 걸었다. 때때로 뛰기도 했다. 아세타졸 덕분인지, 고쳐먹은 마음 덕분인지 숨이 하나도 차지 않았다. 이 정도면 내일 69호수 트레킹도 문제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었으니... 고산병은 실로 무서운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