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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ia Jan 26. 2019

실패해도 괜찮다는 말

[쉼표에서 발견한 것들] 04. 69호수 트레킹, 처음 만나는 고산병

여행은 계속되어야 했다. 삶처럼.


와라스는 파스토루리 빙하 트레킹, 69호수 트레킹, 파론호수(파라마운트라고도 불림 : 파라마운트 픽처스 로고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트레킹 등이 유명하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틀이기에 세 가지를 다 할 순 없었다. 우선 여행자들이 모여있는 단체채팅방을 살폈다. 마침 다음 날 69호수에 가신다는 분이 있어서 함께 트레킹을 하기로 했다.


69호수는 안데스산맥 우아스카란 국립공원(Parque nacional Huascarán)에 있다. 이름은 국립공원 호수 중 69번째로 발견된 것에서 유래했다고. ⓒwikipedia
한국 여행자가 많이 찾는다는 '아킬포 호스텔'의 투어프로그램을 이용하여 69호수를 다녀왔다. 안내문에 유의사항과 일정표가 적혀있다.


당신은 선입견에서 자유롭나요?


69호수 트레킹은 새벽 5시에 시작한다. 물론 이때부터 산을 오르는 것은 아니다. 와라스 시내에서 차를 타고 3~4시간 정도 이동해야 트레킹 시작점이 나온다. 이튿날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준비를 시작했다. 어제저녁에 먹다가 남아서 포장해 온 로모 살타도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해결했다. 픽업 온 가이드와 함께 아킬포 호스텔 앞으로 가니 동행하기로 한 J씨가 있었다. 트레킹 장소로 향하는 버스에서는 ‘오른쪽’ 창 밖 풍경이 더 좋다고 했던 후기가 떠올라 잽싸게 오른쪽 좌석을 선점했다. J씨는 병원에서 일한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의사예요?"라고 물었다. 말을 뱉자마자 아차 싶었다. 후회가 밀려왔다. 무의식 속에 ‘병원에서 일하는 남자=의사’라는 선입견이 자리하고 있었던 거다. 직업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로운 줄 알았는데, 바보 같게도 착각이었다. 그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간호사예요."라고 답했다.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전날 저녁으로 먹은 로모 살타도(Lomo saltado). 얇게 썬 소고기에 양파, 감자 등을 넣고 볶아 밥과 함께 먹는 음식이다. 중국 요리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나를 '가장' 잘 모르는 사람에게 '가장' 솔직해진다는 것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의 배경을 거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여행’이라는 하나의 공통 관심사만으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게 신기했다. 언젠가부터 소수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단둘이 대화를 나누는 게 불편해졌다. 상대의 눈치를 살피다가 횡설수설하거나 내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적이 많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만난 이들과 대화할 때는 어색하거나 힘들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거의 없다. 종종 안 해도 되는 말을 꺼내놓기도 한다. 버스에서 대화를 나눴던 그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나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 사람이라는 점, (웬만하면) 앞으로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는 사실이 마음을 무장해제 시켰겠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때때로 나를 가장 모르는 사람에게 가장 솔직해지곤 한다.


트레킹 장소에 도착하기 전에 버스는 두 번 정차했다. 처음 정차한 곳은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는 작은 휴게소였다. 나는 로모 살타도를 먹고 오기도 했고 배가 부르면 트레킹할 때 불편할 것 같아서, 간식으로 챙겨온 바나나만 먹었다. 두 번째로 정차한 곳은 평지에 있는 호수였다. 이 호수의 색깔이 69호수의 그것보다 예쁘다기에 오래 눈에 담고 싶었지만, 가이드는 딱 사진 찍을 시간만 줬다. 투어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이런 점이 아쉽다. 따로 왔다면 좀 더 오래 머무를 수 있을텐데.


아침식사를 위해 잠시 들른 휴게소.
역시 잠시 들렀던 양가누꼬 호수(Llanganuco Lagoon). 물 색깔이 정말 예쁘다.


아! 내게도 그분이 오시고야 말았다


트레킹 시작. 호기롭게 선두에 섰다. 트레킹은 왕복으로 약 6시간 소요되며, 3900m에서 시작해 4625m에서 끝난다. 난이도가 꽤 높은 편이라 와라스 트레킹의 끝판왕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나는 멀쩡했다. 입을 모아 죽을 만큼 힘들다고 말하던 블로거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눈 앞에 펼쳐지는 장관에 입이 쫙 벌어졌다. 하지만 감탄은 얼마 가지 못했다. 호흡이 가빠졌고, 덩달아 심장도 빨라졌다. 그렇다. 내게도 고산병이 온 것이다. 와라스 시내에서 뛰어다녀도 멀쩡하기에 고산 체질인 줄 알았으나 자만이었다. 대자연 앞에서 나는 한낱 미물에 불과했다.


절경에 탄성이 나왔다. 멀리 보이는 것은 만년설이다.


결국 J씨를 먼저 보냈다. 한참 뒤에서 오던 이들이 하나둘 나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 그룹의 꼴찌가 됐다. 옆에는 나처럼 고산병에 심하게 허덕이는 다른 그룹의 Y씨가 있었다. 그녀 역시 친구를 먼저 올려보낸 터였다. 우리는 너무 힘든 나머지 대화 대신에 헉헉거리는 소리만 주고받았다. 그녀는 내게 코카잎을 건넸다. 있는 힘 없는 힘 다 쥐어짜내서 코카잎을 씹었다. Y씨는 얼마 가지 못하고 나에게 먼저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렇게 혼자가 되어 한 발짝 한 발짝 정말 힘겹게 발을 떼었다. 열 발짝 걷고 쉬고, 열 발짝 걷고 쉬고를 반복했다. 저만치 앞에서 가이드가 나를 불렀다. 그는 왜 이렇게 못 걷느냐며 핀잔을 줬다. 화가 났다. 하지만 화를 낼 힘조차 없었다. 그러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심해진 현기증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가이드는 내 상태를 살피더니 아까와는 180도 달라진 목소리로 말을 한다. “네 몸이 우선이야. 너무 무리하지마. 천천히 올라오렴. 나는 앞서 올라간 사람들 챙기러 먼저 올라갈게.”


그렇게 또 혼자가 됐다. 하도 심하게 비틀거리니 지나가던 여행자마다 괜찮냐고 물었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지만, 살려달라고 매달리고 싶었다. 설상가상으로 트레킹 중간 지점부터 비가 내렸다. 방수 바람막이의 기능을 무력화시키는 아주 세찬 빗줄기였다. 하지만 계속 걸었다.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비록 꼴찌지만, 내 속도에 맞춰 걸으면 끝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위 사진이랑 같아 보이지만 다른 스팟이다. 느려도 멈추지 않고 열심히 걸으면 끝까지 갈 수 있다고 믿었건만.
바로 코앞에 만년설이!


마지막 오르막 코스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저 아래 사람 실루엣이 보였다. 어라? Y씨다. 포기한 줄 알았는데, 그녀도 자신의 속도에 맞춰 계속 올라오고 있었던 거다. Y씨는 이내 나를 앞질렀고 나 역시 호흡을 가다듬고 그 뒤를 따랐다. 그러다 J씨를 만났다. 우리 그룹이 하산하기 시작했단다. 그는 내게 15분만 더 올라가면 된다며 ‘화이팅’을 외쳤다. 그의 말에 힘내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 가이드는 당장 내려가라며 성화를 냈다. "넌 30분이나 늦었어. 얼른 내려가."


사진에는 안 담겼지만 비가 내리는 중이다. 열심히 걷다 뒤를 돌아보니 또다른 절경이 펼쳐졌다. 아쉽게도 이 풍경 감상을 끝으로 하산해야 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되는데.
그렇게 나는 해발 4460m에서 멈추고 말았다.


내가 기다리고 바랐던 것은,


결국 나는 완주하지 못했다. 늦었다는 이유로 호수 바로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남들 다 하는 걸 나는 왜 못했을까. 누구는 토하면서도 끝까지 올랐다는데. 자괴감은 내려오는 내내 나를 괴롭혔다. 억울하고 속상하고 창피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Y씨는 하산하던 친구가 방향을 틀고 호수까지 함께 올라가 줬단다. 또 그 그룹의 가이드는 그녀가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다고. 나도 누군가 옆에서 함께 걸어줬으면, 누군가 느린 내 속도를 이해하고 기다려줬으면 끝까지 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믿음, 응원, 동행, 인정 따위의 것들은 생각보다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된다.


한편으로는 어쩌면, 나는 알량하게도 ‘내려가라'는 말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패해도, 포기해도, 그만해도 괜찮다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이야기해주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끝까지 가지 못했다고 해서 패배하거나 낙오한 것이 아니라고도 말해주길 기다렸을지 모른다.


비 맞은 생쥐 꼴을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원래 J씨와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너무 힘든 나머지 약속을 취소했다. 비를 맞은 탓에 감기 기운이 찾아온 것 같았다. 어서 몸을 회복해야 했다. 하지만 숙소는 너무 춥고 별도의 난방기구도 없었다. 우유니 소금사막에서 쓰려고 가져온 핫팩을 이불 안쪽에 넣었다. 몸이 조금씩 따뜻해졌다. 하지만 이날 걸린 감기는 여행 절반 기간 내내 나를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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