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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ia Apr 25. 2021

쿠바 비아술 버스는 시속 80km를 넘지 않는다

08. 뜨리니다드로 가는 길

당신의 여행스타일은?


뭐든 할수록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가기 마련이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나의 경우에는, 사전 조사와 꼼꼼한 계획을 세우고 유명한 카페, 식당, 관광지를 찾아가는 것보다 발길 닿는 대로, 그때그때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는 것이 더 잘 맞는 것 같다. 비냘레스에서는 크게 한 일 없이 즉흥적으로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정이 많이 들고 지금까지 그리운 것을 보면 그때의 날들에 '억지'가 없었기 때문인 듯하다.


비냘레스에서 뜨리니다드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한 번밖에 없다. 그것도 이른 아침이다. 동이 트지 않은 껌껌한 새벽에 까사를 나섰다. 무서운 마음에 주의를 계속 두리번거렸다. 큰 길가로 나오니 다행히 한두 명씩 지나가는 사람이 보였고 가로등도 켜져 있었다.


예약해두었던 버스표를 받았다. 그런데 내 이름이 잘못 적혀있다. 여권까지 보여줬건만, 왜 CHOI EUNYERIS라고 적은 것이야. 하지만 이름이 잘못 적혔다고 해서 탑승에 문제가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캐리어가 짐칸에 무사히 실리는 것을 확인하고 버스에 올랐다. 내 옆에는 나처럼 홀로 여행 중인 서양 남자가 앉았다.


YEONG과 YERIS는 철자 차이가 큰데, 어찌해서!


비행기도, 기차도 아닌 버스를 11시간 타야 한다니!


비냘레스에서 뜨리니다드까지는 11시간이 걸린다. 택시 등의 다른 교통수단으로는 좀 덜 걸린다고도 하던데, 비아술은 시속 80km를 넘지 않으며 운행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몇 차례를 자다 깼지만, 여전히 도로 위였다. 다행히 휴게소에 들러서 기지개를 켤 기회가 있었다. 두 번째 휴게소에 도착했을 땐 점심시간이었다.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사람들 눈치를 살피다가 4쿡짜리 샌드위치를 샀다. 미리 준비해두지 않고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그때 만들어줬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단, 가성비가 좋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관광업으로 많은 수입을 벌어들이는 나라 특성 때문인지 (휴게소임을 고려하더라도) 쿠바의 휴게소 물가는 굉장히 비싸다. 샌드위치와 함께 사 먹은 콜라는 무려 1.5쿡이었다. 같은 가격이면 일반 슈퍼마켓에서 2캔을 살 수 있을 텐데.


꾸바나깐에서 운영하는 휴게소 카페테리아. 영업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란다. 잠깐, 그럼 그 이후에는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는 건가?
오이, 햄, 머스터드, 케첩이 속재료 전부였던 샌드위치. 그래도 빵을 따뜻하게 구워줘서 맛있었다.


영어 좀 못하면 어때서


버스는 다시 뜨리니다드로 향했다. 더는 잠도 안 오기에 가이드북을 펼쳤다. 집중해서 읽고 있는데 옆자리 남자가 말을 걸었다. "Are you Korean?"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국적을 물었다. 호주에서 왔단다. 혼자 다니는 여행객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나를 만난 게 반가웠던지 그는 신나게 썰을 풀기 시작했다. 서울에 가봤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 한국어로 된 인사말까지 나열했다. 나 역시 그가 반가웠고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짧은 영어 때문에 웃는 일 빼놓고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10년 넘게 영어를 배우면 뭐 하나. 토익 점수가 높으면 뭐 하나. 외국인 만나면 꿀 먹은 벙어리인데.


나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머쓱해진 그는 이내 조용해졌다. 생각해보니 미안하네. 손짓 발짓이라도 하며 맞장구 좀 쳐줄 걸. 아는 단어라도 쭈욱 나열해볼 걸. 영어 못하는 게 창피해서, 그걸 들키는 건 더 창피해서 입을 꾸욱 닫고 있었는데, 돌이켜보면 그렇게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이 정말 창피하다. 영어 못하는 게 뭐가 어때서!


버스가 또 섰다. 이번에는 휴게소가 아니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승객들에게 기사님이 내리라고 손짓했다. 버스는 태운 승객 하나 없이 홀연히 자리를 떴다. 눈치를 보니 차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알고 보니 쿠바에서는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단다. 고속도로 위에서 버스가 고장나서 시간을 지체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우리는 그나마 다행인 건가. 내린 곳은 뜨리니다드 옆 동네인 시엔푸에고스였다. 태풍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한 이의 이름을 땄다는 그곳. 여행 동선에 포함할까 말까 고민한 곳인데, 이렇게 와 보는구나.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꽤 오랜 시간 기다렸는데, 아무도 화를 내거나 의아해하지 않았다. 한국이었다면 어땠을까?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한 커플은 길가에 누워버렸다. 자유로워 보여서 부러웠지만, 동시에 청결 걱정을 했다. 하하.
시엔푸에고스의 시내버스.


기약 없이 떠난 버스는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불안이 똬리를 틀기 시작할 즈음 앞쪽 골목에서 버스 한 대가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그렇게 다시 출발한 버스는 시엔푸에고스 터미널에서 사람들을 내려주고 뜨리니다드로 향했다. 내 옆자리 남자도 시엔푸에고스가 목적지였나보다. 내게 "안녕히 가세요"라고 또박또박 말한 후 자리를 떴다. (며칠 후 뜨리니다드 마요르광장에서 그를 다시 봤다. 매우 반가웠지만, 소심한 마음에 아는 척을 하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지키는 힘


시엔푸에고스에서 뜨리니다드로 이동하는 동안, 쿠바에서 그간 보고 느낀 것들을 떠올려봤다. 까데까(환전소)나 에떽사(통신사)에서 여기저기 흩어져서 기다리던 사람들, 사람과 동물, 차가 한 데 섞여 이용하는 도로 등. 겉으로 보기에 이곳은 굉장히 무질서하다. 하지만 '울띠모' 문화와 불평불만 하나 없이 동물을 피해 운전하는 사람 등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곳에도 분명 규칙은 있다. 다만 보이지 않을 뿐. 보이지 않는 규칙을 지탱하는 힘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문득 '보이지 않는데 뭐 어때'라고 생각했던 지난날의 자신이 떠올랐고, 잠시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비냘레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뜨리니다드 터미널에도 호객 행위가 엄청났다. 까사 주인들이 여행객들에게 계속 들러붙었다. 나 역시 타깃이 되었다. 1박에 15쿡 해주겠다는 한 아주머니의 꼬임에 넘어갈 뻔했다. 겨우 빠져나와 오달리스 아주머니가 추천해주셨던 알베르띠꼬 까사를 찾아 나섰다. 손전화가 없으니 가이드북에 있는 지도로 방향과 길을 찾아야 했다. 우선 까사 근처라는 마요르광장으로 향했다. 한참을 걸었지만 광장이 보이지 않았다. 심각한 길치에 방향치인 내게 뜨리니다드의 골목길은 모두 똑같아 보였다. 곧 해가 질텐데. 조급해졌다. 아무나 붙잡고 마요르광장의 위치를 물었다. 다행히 근처에 있단다. 길을 아예 잘못 들어선 건 아니라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마을의 중심인 마요르광장. 이 근처에 상점, 식당, 까사가 많다. (광각렌즈 좀 가져갈 걸.)


안녕, 내가 알베르띠꼬야


이제 까사를 찾을 차례였다. 오달리스 아주머니가 주신 명함과 골목의 길 이름을 대조해가며 천천히 건물을 찾았다. 두어 골목쯤 지났을까. 한 남자가 나를 부른다. '또 호객이야?', '동양 여자가 그렇게 신기한가'하는 생각으로 가볍게 무시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 나를 불렀다.


뭐지?


남자는 내 손에 들린 명함을 가리켰다. 자신이 알베르띠꼬란다. 이상하다. 명함에 있는 사진이랑 다른 사람인데? 의심의 눈초리로 대하자 그는 재차 자신이 그 사람이라며 내 캐리어를 잡아끌었다. '아바나 오달리'라고 말하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쿠바 사람들은 종종 'S' 발음을 하지 않는다. gratis도 '그라띠'라고 발음하더라. 알베르띠꼬 아저씨는 odalys를 '오달리'라고 발음했다.)


까사 앞에 다다르자 그는 집 명패를 가리키며 나를 보고 웃었다. 오! 내가 찾던 곳이다! 또다시 안도의 한숨. 잠깐이나마 그를 의심했던 게 미안해졌다. 웰컴주스로 건넨 망고주스를 들이켜며 방을 살폈다. 넓은 데다가 청결했다. 숙박비는 조식 포함 25쿡. 망설이지 않고 묵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아바나클럽 잔에 담긴 망고주스! 다음에 쿠바에 가면 저 잔을 꼭 사오리라.
뜨리니다드에서 묵었던 알베르띠꼬 까사. 방이 아늑하고 깨끗했다.


짐을 풀고 근처를 구경할 겸 까사를 나섰다. 까사를 찾느라 뾰족해져 있던 마음이 조금씩 뭉툭해졌다. 동시에 아기자기한 마을 풍경도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속도로에서도 시속 80km를 넘지 않는 비아술 버스처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뜨리니다드를 살펴보기로 했다.


숙소 근처의 '엘 히게'(El Jigue)에서 저녁을 먹었다. 외관과 인테리어가 고급스러워서 음식 값이 비싸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우려와 달리 저렴한 편이었다. 모두 8.95쿡.
뜨리니다드의 명물 까사데라무시까. 밤이 되면 춤추는 사람들로 넘친다고. 클럽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낮 공연만 즐겼다. 종일 공연이 있지만, 낮에는 무료, 밤에는 유료다.


작고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뜨리니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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