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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수 Aug 31. 2019

<신의 위대한 질문>을 읽고

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우주의 역사에 비하면 찰나의 순간이다. 우리의 존재는 먼지에 불과하다. 하지만 신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미션을 찾은 자는 우주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다. 삶의 허무함을 이겨내고 신과 함께 역사를 만든 자가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미션을 찾으려 하지 않거나 찾더라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 특별한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역사를 만드는 일에 동참하고 싶지만 동시에 실패의 두려움이 몸과 마음을 짓누른다. 


“사람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임무가 있다. 그 임무를 신약성경에서는 달란트라고 한다. (중략)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죄는 자신이 꼭 해야 할 일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으며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이다”



“네가 어디 있느냐?”


신이 인간에게 던진 첫 질문이다. 단순하고 분명하지만 인간의 정체성을 묻는 어려운 질문이다. 에덴동산에서 살던 아담과 하와는 금지된 열매인 선악과를 먹고 난 후 눈이 밝아진다. 스스로의 모습을 인식하면서 자신들이 벌거벗었음을 알게 되고 신으로부터 몸을 숨긴다. 신이 그들이 어디 있는지 모를 리 없지만 질문을 통해 자신들이 한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어디(Where), 라는 의문사는 장소만을 뜻하진 않는다. 현재를 묻는 듯하지만 과거일 수도 미래일 수도 있다. 인간은 그의 몸이 머무는 곳, 의식이 머무는 곳이 존재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낸다. 그래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해야 한다. 


선악과는 인간이 동물의 인식 수준을 넘어 의식이 있는 인간으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 신은 언젠가 인간이 그렇게 되리란 걸 알고 있지만 그 선을 넘는 순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결국 에덴동산을 쫓겨나 아담은 땀 흘려 일해야 먹을 것을 얻게 되고 하와는 아이를 낳는 고통을 견뎌야 한다. 현실을 깨닫는 지식을 얻었으나, 동시에 실존적 현실 속으로 던져진 것이다.


오늘날의 삶도 에덴동산을 떠난 직후의 우리 조상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농경 기술이 발달하고 과학적 지식이 더 축적되었지만 실존적 현실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 많은 인간이 아직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고 출산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우주를 이해하고 탐험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건 인간이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 알려줄 뿐이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각자 판단할 일이다. 


성경은 창세기에서 인간이 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모두 자신의 DNA 속에 잠재되어 있는 지식과 의식을 갖고 있다. 그 지식을 발견하고 스스로에 대해 깨달은 자는 자신이 어디를 향해야 할지 잘 알고 있으리라.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수 있느냐?”


아브람은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신앙의 조상이다. 신은 아브람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한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두 번째다. 첫 번째는 인간의 돌발적 행동으로 인한 것이지만, 두 번째는 신의 정교한 계획 아래 이루어진다. 기득권을 모두 버리고 신과 동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의 믿음을 확인하려 한다. 고대 사회에서 무리를 떠나는 일은 곧 죽음이다. 특히, 유목 사회에서는 자신이 사는 지역을 떠나는 일이 자살 행위와 다름없다고 한다. 하지만, 75세의 아브람은 과감히 고향을 떠난다. 


우리는 마음속 신의 목소리를 듣고 새로운 삶을 위해 현재를 버릴 수 있을까? 가진 것 모두를 버리기는커녕 일자리만 잃어도 모든 것을 잃은 실망감에 잠겨버린다. 종교인들조차 신뢰를 얻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한 평범한 개인이 자신의 신을 믿고 새로운 삶을 위해 현재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릴 수는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닫아버린 세상 속에서 아무런 변화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결국 우리 중 대다수는 그렇게 미적거리다 삶을 끝내고 만다.


기술의 발달은 어떻게든 인간의 삶을 연장시키려 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이 축복일 수는 없다. 특히, 부유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하지만, 부유한 이들도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갈 수 없다면 연장된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성경의 첫 번째 형제는 카인과 아벨이다. 카인은 아벨을 죽이고,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신의 질문에 자신이 동생을 지키는 자이냐며 대든다. 그럼에도 신은 카인에게 표적을 주어 그가 보호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이 사건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지 분명하게 묘사한 바 있다)


두 번째 형제인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동생인 야곱은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 이삭(아브람의 아들)에게서 장자의 권한과 축복을 받아낸다. 이후 형을 피해 도망간 야곱은 외삼촌의 집에서 오랫동안 일을 한 대가로 두 아내를 얻고 많은 재산을 크게 불린다. 하지만, 그의 삶은 불안하기만 하다. 거북이나 연어가 고향으로 돌아와 알을 낳듯이 그 또한 고향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과정이 남아 있다. 


형을 만나기 하루 전 그는 가족과 아이들을 먼저 강을 건너 보내고 자신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망가려는 마음을 먹고 있다. 나약해진 그는 신에게 기도한다. 제발 형의 손에 죽지 않도록 해달라며 자신의 욕심만 가득한 기도를 한다. 이런 야곱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참 비슷하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지지 못하고 오히려 회피하며 남이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대책 없는 모습이다. 


그날 밤 그는 낯선 자와 씨름을 하게 된다. 야곱은 그가 신이 보낸 자임을 직감적으로 알고 자신을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겠다며 오히려 으름장을 놓는다. 축복이 없으면 차라리 죽겠다는 결심이다. 낯선 자는 결국 그에게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을 붙여주며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한다. 아마도 그는 꿈을 통해 과거의 자신과 결별하기 위한 씨름을 한 것이리라. 자신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당당히 버팀으로써 새로운 자신이라는 축복을 받는다. 


그리고 다음 날, 에서와 야곱은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린다. 형제임에도 서로를 원수로 생각하고 외롭게 세상과 마주해야 했던 지난 20년이 이젠 고통이 아니라 추억이 된다. 아브람은 이름까지 버리며 고향을 떠났지만, 야곱은 새로운 이름을 얻으며 고향으로 돌아온다. 야곱의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은 그의 후손들에게 절대로 잊히지 않는 이름이 된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오는 여정도 떠날 때처럼 목숨을 각오해야 한다. 



“네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성경의 출애굽기 또는 엑소더스로 알려진 모세의 이야기는 아브람이나 야곱의 이야기보다 훨씬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여러 기적이 나타나는 감동적인 대서사시다. 


모세는 이집트의 노예 계급인 히브리인의 아들로 태어난다. 당시 히브리인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두려웠던 람세스는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모세의 어머니는 모세를 갈대 상자에 담아 강물 위로 띄워 보낸다. 마침 강에 목욕을 하러 나온 파라오의 공주가 이를 발견하게 되고 궁으로 데려와 키우게 된다.


어른이 된 모세는 자신과 같은 종족인 히브리인이 이집트인에게 학대당하는 것을 보고 그 이집트인을 죽인다. 그리고 사람들이 거의 거주하지 않는 미디안 땅으로 도망친다. 그곳에서 모세는 40년간 유목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양 떼를 몰고 산을 올랐다가 저녁이면 돌아오는 단순하지만 고독한 삶을 살면서 자연과 함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불타는 가시떨기나무에서 자신을 부르는 신의 음성을 듣는다. 신은 “이제 나는 너를 파라오에게 보내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겠다”며 자신의 의지를 전한다.


그런데, 모세의 태도가 이상하다. 신에게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냐며 당돌하게 질문하고, 파라오가 신이 이집트를 굴복시킬 것이라는 자신의 말을 믿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고 의심한다. 신은 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모세에게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는 기적을 보여준다. 


우리가 손에 갖고 있는 것은 신이 보기에 하찮은 것이다. 하지만, 신은 의심 많고 고집불통인 모세를 설득하기 위해 그랬던 것처럼, 하찮은 것으로도 신의 뜻을 실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신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삶에 주어진 미션이 무엇인지 발견했다면 현재 나의 모습, 내가 가진 것에 실망할 필요가 없다. 그저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된다. 미션이 올바르고 그것이 나의 것임이 분명하다면 신은 당신이 가진 것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물과 사람이 그 미션을 달성할 수 있도록 돕게 한다. 그리고, 신의 목소리는 당신이 오랫동안 찾아왔던 당신 내면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부정적 수용 능력이란 삶에서 흔히 마주하는 모순들을 기존 질서 안에서 쉽게 해결하려는 유혹을 뿌리치고 혼돈을 있는 그대로 자신의 삶의 일부로 가져가는 태도다. (중략) 불확실하고 신비하고 의심스러운 상태에 의연하게 거하는 능력이다. 삶은 우리가 경험한 것에 대한 질문을 끝없이 발굴하고 그 질문과 함께 사는 것이다.”


부정적 수용 능력(Negative Capability)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사람은 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John Keats)다. 이 개념은 혼돈과 질서 모두를 긍정하고 그 속에서 균형을 찾아나가야 한다는 조던 피터슨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삶의 과정에서 우리는 새로운 상황, 새로운 문제를 경험하게 되고 그것을 기존 질서 안에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새로운 문제를 기존의 질서에서 해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불확실하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가진 혼돈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 자신을 성장시키고 우리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그릇을 더 키울 수 있다.



신의 질문은 내 마음속 내면의 질문이다. 스무 살, 이제 겨우 진짜 세상의 문에 들어선 나에게 던져진 첫 질문은 “왜 사는가?”였다. 너무나 큰 질문이었고 그 질문을 마주한 이후 내 삶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물리학과 수학으로 세상을 이해하고자 했던 나의 꿈은 뒤틀어졌다. 세상을 이해하겠다는 것도 결국 나의 삶을 위한 것인데, 도대체 내 삶은 무엇을 위한 것이란 말인가? 기존의 모든 생각들이 해체되고 머릿속은 혼돈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수업 시간에도 전공 서적 위에 소설책이나 철학책을 펼쳐놓고 있는 나 자신을 바라보며 묘한 쾌감을 느꼈다. 커다란 망치를 들고 무언가를 때려 부수는 듯한 그런 쾌감이었다. 일 년 반 정도를 그렇게 보냈다. 그리고 군대에 들어갔다. 세상은 어쨌거나 책 만으로 알 수 없고 내 몸으로 부딪히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곳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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