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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i Mar 16. 2020

<캐쉬백>(2019)을 보고


<캐쉬백>에서 가장 큰 미덕은 역시 인물들이 왕왕 짓는 난처한 표정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주칠 때마다-자신의 영역에 누군가 들어오는 순간-이러한 얼굴을 내보인다. 예컨대 (알 수 없는) '그 물건'을 사기 위해 돈을 모으러 중고 거래를 시작한 고우가 첫 고객을 맞닥뜨리는 순간처럼.

<캐쉬백>에는 21세기 서울의 현실과는 영 동떨어진, 오히려 고전적 유형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특정한 내러티브에 속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물들이라기보다, 특정 장르를 지탱하기 위해 오래도록 다듬어진 유형 자체에 가깝다. 이들은 사기를 치고, 복수를 꾀하며, 어설픈 실수를 저지른다.

고우의 고객들은 바로 이러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영화 속 현실을 대변한다기보다, 현실 속에서 볼 수 있는 영화적 인물들에 가깝다. 이들의 행태는 고우가 팔아넘기고자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물들-카메라와 외장하드, 노인들이 남기는 옛 세대의 물건-과 대비된다. 그 자체가 이미 '곤경에 빠진 주인공'의 전형인 고우는 영화 내내 심각할 수밖에 없다. 이토록 극적인 이들과 그토록 현실적인 거래를 성사시켜야 하니 말이다. 그런 순간마다 그가 짓는 우스운 얼굴들에는 명료한 감정이 담겨 있다. 자신과 전혀 다른 전형의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그 불편함, 거북스러움.

물론 앞서 말했듯, 고우 또한 '극적인' 인물들에게 휘둘리는 '현실적인' 희생자는 아니다. 영화 속에서 고우(그를 연기하는 배우 ‘이태우’는 밴드 유기농맥주의 일원이자 전자고우를 운영하는 음악인으로, 대부분의 예술 활동 및 일상생활에서도 ‘고우’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또한 피와 살 그리고 취향을 가진 인물이라기보다는, 분명한 욕망-다음 날 새벽 여섯 시까지 이백만 원을 모아야만 살 수 있는 미지의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내달리는 몸짓 혹은 장치에 가깝다. 이는 <캐쉬백> 속 인물들이 납작하다거나 상투적인 말이 아니다. <캐쉬백>의 가장 큰 미덕은 인물들 혹은 상황의 전형성을 의도적으로 늘어놓으면서, 지극히 영화적으로 몸짓을 구축하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몸짓은 고우가 뛰어다니는 서울의 풍경에서도 종종 두드러진다. 고우가 팔아넘기는 물건들의 궤적에서 나타나는 서울의 밤 풍경은 빛의 질감을 강화한 또 다른 차원이다. 인물들 사이는 안개처럼 흩어진 광선으로 가득하며, 영화가 치달을수록 이 빛 덩어리는 인물들의 형태를 대신하며 화면을 메우기도 한다. 관객에게 알리지 않는 욕망을 스위치 삼아 작동하는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비상식적인 인물들……그들은 붉거나 푸른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거래를 한다. 인물들은 의도적으로 예의를 제거한 듯, 혹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단단히 뒤틀린 듯 한 태도로 서로를 대한다. 마치 각자의 행성(영화)에서 전혀 다른 의사소통을 배우다가 중고거래라는 정류장에서 서로를 만나게 된 외계인 같다.

영화를 처음과 끝으로 나누고 그 사이의 사건을 연결 지어 정리해보자. <캐쉬백>의 서사 유형은 사실상 고전적인 비극에 가깝다. 시간 제약에 걸린 욕망을 갖게 된 주인공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다양한 인물을 만난다. 그의 소망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실현되려는 순간, 그는 눈앞에서 기회를 놓친다. 그는 실패한다. 동시에 <캐쉬백>은 희극의 규칙 또한 충실히 따른다. 고우가 목적에 가까이 다가가는(듯 보이는) 순간이나 최종적인 목표를 상실하는 장면 모두 웃음의 잔 부스러기로 가득하다. 물론 이 부스러기를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은 또다시, 인물들의 얼굴이다. 고우가 타인을 만나는 순간마다 얼굴을 찌그러트리며 짓는 그 표정. ‘그것’이라는 외부를 성취하기 위해 끝없이 만나는 타자는 고우에게 그저 곤혹스러운 존재들일 따름이다. 외부보다도 먼 곳에서 그 풍경을 관람하는 우리들-스크린 너머의 관객은 그 사실에 자주 웃음을 터뜨린다.

영화가 불러오는 웃음이 비웃음인지 혹은 안쓰러움의 표현인지 단언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고우의 얼떨떨함이 영화 전체가 자아내는 불편함과 연관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캐쉬백>이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의 유머는 서사 곳곳의 고리를 이어 붙여 만든 고유의 것으로, 불특정 다수 모두가 특정한 공감대 없이도 받아들일 수 있다. 불편해 하는 쪽은 관객이 아닌 영화다. 2018년의 서울을 배경으로 삼은 영화는 자신의 극적 세계와 현실의 다채로운 양상에 괴리감을 느끼는 듯 보인다. 이는 다름아닌 자신(영화)이 만들어진 방식 그 자체에 대한 괴리감이다. <캐쉬백>의 형상과 (생성) 조건은 분명한 모순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순은 물론 영화 속 타인들로부터 시작한다. 영화 바깥 타인의 존재를 의식적으로 드러낸 일부 영화들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극영화 촬영장에서 타인이란 녹화 중의 세계를 방해하는 요소로 여겨진다. 영화를 함께 만들고자 약속하지 않은 이들, 즉 외부인들은 종종 예기치 못한 순간 포커스 안으로 들어온다. 그들은 정면으로 카메라를 바라본다. 조율한 동선을 넘나든다. 그들은 영화를 만드는 구성원들 간 합의된 세계로 간단히 뛰어들어 눈빛 혹은 목소리, 선을 넘는 몸짓으로 그것을 무너뜨린다. 의도한 영화 내 세계를 축조하기 위해서는 갑자기 뛰어드는 타인들을 내쫓아야 한다.

한국에서 독립영화를 촬영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군중(영화 촬영 중 마주치는 타인들은 너무도 쉽게, 초대하지 않은 군중들로 인식된다)들이 카메라의 가시거리 안에 들어오지 않도록 애걸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세트를 마련할 예산이 없는 가난한 제작자일수록 이런 경험을 켜켜이 쌓아놓는다. “영화 촬영 중인데 잠시만…”으로부터, “죄송한데 저희가 지금……”등으로 이루어지는 경험.

그러나 녹화 중인 세계가 하나의 클립으로 만들어진 뒤의 영화는 급작스럽게 타자를 필요로 한다. 그 순간의 타자들은 물론 관객으로, 영화는 이 때 갑작스럽게 퍼포먼스와 수평의 관계를 맺는다.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예술가가 자신의 고립된 활동을 그대로 응시할 관객을 필요로 하듯이, 영화는 영사된 세계 속에서 고독하게 움직이는 이미지들을 응시할 관객을 원한다. <캐쉬백>이 내쉬는 난감함은 여기에 있다. 극중 고우의 표정으로 무엇보다도 단순하게 나타나는 하나의 메시지. 나는 당신이 너무나 불편하지만 그보다도 더 필요해요. 고우는 자신의 소중한 물건들-끈적끈적한 손으로 만지는 카메라부터 내구성을 알기 위해 던지는 외장 하드까지-을 함부로 다루는 이 고객들이 경멸스럽다 못해 혐오스러우나 그보다도 더 필요하다. 때문에 그의 거래는 언제나 이 둘 사이의 무게를 쟤는 긴장으로 가득하다.

바로 여기에서 등장하는 제이(역할을 연기한 배우 ‘이재현’은 역시 고우와 같은 밴드 유기농맥주의 일원이며, 평상시에 자신의 예명 ‘제이’를 사용한다)는 이 모순 위로 미끄러져 내리는 변수이다. 거의 상쾌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그의 등장은, 고우의 목적 위주 내달리기에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제이의 욕망은 사물 혹은 돈을 거래하는 다른 인물들과 전혀 다른 노선에 있다. 그는 고우와 동행하기를 원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산책이나 하는 것, 그 김에 고우가 바가지를 씌워서 판 카메라로 그의 사진을 찍어주는 것이 제이의 목적이다. 가격 흥정에서 한 차례도 자신의 의견 혹은 선택을 양보하지 않았던 고우는, 자신이 전혀 예상치도 못하는 제이의 욕망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제이의 욕망은 고우가 상상한 세계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제이는 영화 안에서 합의된 긴장의 질감과 전혀 다른 자리에 서 있다. 그에게 타자란 딱히 거북스러운 존재도 아니다. 제이는 망설임 없이 다른 사람의 얼굴 혹은 흔적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촬영할 수 있다. 피사체가 왜곡되는 것에도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제이라는 인물의 이질적인 면모는, <캐쉬백>에서 가장 평화로운 광경을 만들어낸다. 제이와 함께 거래를 하러 가는 고우는 어느 때보다도 편안한 얼굴로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한다. 그 순간만큼 고우는 고전적 희비극에 등장하는 전형적 인물이라기보다, 친구와의 동행을 즐기는 누군가의 얼굴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평화로운 순간은 그 다음 나타난 가장 거대한 장해물인 대영 앞에서 산산이 부서진다. 대영은 고우가 원하는 금액 그 이상을 갖고 있으나, 그 거래 대상인 물건-학 우표는 어느 새 사라져 버렸다. 욕망의 성취에 가장 가까운 순간에 엔진이 부서진 것이다. 대영은 고우가 만난 그 어느 고객보다 낯선 영역의 타자로(고우는 대영이 학 우표와 관련하여 늘어놓는 전 세대의 이야기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 고우의 욕망에 제일 가까이 서 있으나 동시에 가장 강력한 힘으로 그 욕망을 무너뜨린다. 마치 타인을 충실히 배제하여 충분히 연출적인 세계를 조성한 영화가 실제의 타자인 관객들에게 외면 받듯이.

<캐쉬백>은 오늘날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순간마다 겪고 마는 머쓱함-제작 과정에서는 타인을 배제해야 하는 동시에 잠재적 관객으로서의 타자를 희망하는 모순의 얼굴과도 닮아 있다. 동시에 <캐쉬백>은 흥겨운 모험담이며, 빛으로 덩어리진 가상의 서울을 배회하는 로드무비이다. 그러나 <캐쉬백>은 서울 한복판에 던져진 고우에게, 영화 촬영을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가던 행인이 던진 깡통을 결국에는 기록하고야 마는 영화이다. 영화 중 가장 극적인 장면이라 할 만한 학의 날개짓을 담은 쇼트는 영화 제작의 의지와는 전연 상관없이 흔들리며 날아가고, 준비 과정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행인은 불현듯 쓰레기를 던진다. 영화의 안팎으로 줄곧 이어지는 줄다리기가 내뿜는 팽팽함에서, <캐쉬백>은 자신만의 힘을 얻는다. 그 속을 자신의 이름-별명을 들고 나와서 배회하는 배우들이 우스운 얼굴로서 이야기한다. 나는 당신이 아직도 불편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당신이 필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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