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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막 일장 Oct 30. 2023

연극 <곡비>

곡비는 왜 남을 위해 울었을까?


연극의 제목은 <곡비>이지만 곡비보다 소비에게 이상하게 마음이 더 쓰인다. 곡비는 남을 위해 ‘울어주는’ 사람, 소비는 남을 위해 ‘웃어주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연극에서는 소비가 곡비보다 더 곡비 같았다. 자기 안의 슬픔이 너무 큰 나머지 웃음으로 애써 덮으려는 소비. 남을 위해 웃어야 하는 데 슬픔이 큰 나머지 끝내 웃음을 잃어버린 소비. 특히 소비 역의 윤상화 배우가 웃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울고 있는 것인지 모호한 표정을 지어서 그런지 그런 생각이 더 들었다.


연극에는 곡비와 소비, 그리고 위대한 곡비 세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거나 받는다. 왜 곡비는 남을 위해 울어주냐고. 그 질문에 각자 어떻게 답했을까? 그리고 연극을 본 나는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곡비는) 자기를 위해 울지 못하면서 남을 위해서는 운다는 대사가 극 중에 있다. 역사 속에서 곡비는 천한 신분으로 무시당했던 존재임을 떠올리면 ‘자신을 위해서는 살지 못했던 걸까?’라고 착잡한 마음이 든다. 곡비와 소비는 사람들이 밉지 않았을까? 평소에는 무시하다가도 필요할 땐 먼저 찾는 사람들을. 두 사람의 마음은 직접적으로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은 누군가 자신을 찾으면 기꺼이 울어주고 웃어준다.

어떻게 기꺼이 울어주고 웃어줄 수 있을까?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못하기에 타인의 삶 안으로 들어가서야 그간 쌓아왔던 감정을 함께 흘려보내는 걸까? 그렇다면 그들은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삶을 살아온 걸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왜 곡비와 소비를 퀴어로 설정했는지 조심스럽게 추측하게 되었다. 연극은 이러한 곡비와 소비라는 인물을 통해 ‘인정받기’가 누군가에게는 어려운 나머지 겨우 쥘 수 있는 거라 말하는 거 같다.


곡비는 위대한 곡비의 제자로 들어가게 된 이후 그의 울음소리를 흉내 내며 자만해진다. 그렇게 곡비는 위대한 곡비와 더 가까워지고 소비와는 멀어진다. 소비와 함께한 기억까지 외면하면서. 사이 소비는 상실감을 겪는다. 

시간이 지나고 위대한 곡비는 떠났다. 무대에 남은 곡비는 위대한 곡비가 우는 것처럼 울기보다는 소리를 낮추며 울었다. 그때 곡비는 자기만의 울음소리를 냈다. 위대한 곡비가 사라지자 겨우 자기로서 운 걸까? 한때 위대한 곡비를 따라 하고자 했던 곡비는 이제는 진정으로 운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었을까? 아니면 위대한 곡비가 남긴 외투를 입고 그처럼 업계 대선배이자 생존자로 살아갈까? 곡비 주변에 소비가 있는 걸 보아 전자인 듯하고, 전자였으면 했다. 자기만의 울음소리를 냈다가 다시 잃어버리는 것만큼 잔인한 일도 없으니까.


무대는 무대와 객석 모두 통틀어 썼다. 특별한 무대 장치나 소품은 없었지만 전박찬, 윤상화, 색자 세 배우의 존재감으로 작품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위대한 곡비와 처음 곡비가 내는 울음소리가 왜 숨소리와 같았는지 계속 의문이었다. 그러다 울음은 어떤 감정에 놓였는지에 따라 다른 거지 사람마다 다른 게 아님을 문득 느꼈다. 즉 적어도 후자를 드러내기 위해 목소리가 드러나기 어려운 숨소리를 의도적으로 드러낸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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