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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트코치 이용만 Nov 23. 2020

창의적 글쓰기는 '미루기'에서 시작된다.

[미루기 예찬론]


울엄마는

35년째 다이어트 중이다.

이보다 꾸준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무렵,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울엄마는 다이어트를 하는 방법을 찾아보고, 다이어트 식품을 구매하는 일련의 행동 자체를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소주 한 병 사 와서 가만히 바라보며 취하길 바라는 것이랄까. 로또를 사지도 않고 '왜 로또가 안되는지 모르겠다'라며 한탄하는 셈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다.

35년 동안 살은 안 빠지는데, 각종 신박하고 창의적인 다이어트법은 계속 튀어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다이어트를 미뤘더니 살 빼는 기발한 방법과 요령들이 넘쳐나고 있다.


도대체 왜 그럴까?



브런치에 저장된 글이 무려 44개나 있었다.

다른 말로 쓰다 만 글이 44개가 쌓여있다는 말이다.

또 다른 말로 일단 미뤄둔 글이 44개라는 말이다.




써야 되는데 그냥 미워두고 있다.

왜냐하면 마음에 드는 기발한 표현이나 위트·반전이 있는 전개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안하지는 않다. 뭔가 딴 일을 하다 보면 느닷없이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경험을 숱하게 해왔기에.

가령 와이프가 해준 음식을 먹을 때라든지. 미각이 충격을 받으면, 반작용으로 뉴런이 움직이기도 했으니.


미리 말하지만

미룬다는 건 잠시 보류의 개념이지, 기약 없이 딜레이 하거나 포기하는 건 아니다.  전략적 미루기는 게으른 자들의 비겁한 변명과는 거리두기 3단계이다.




게으름과 기다림
사이의 아찔한 줄다리기


'늑장 부리기, 미루는 버릇, 꾸물거림증'

이라는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procrastination'라는 단어가 있다. "앞으로"를 의미하는 접두사 pro-와 "내일의"를 의미하는 crastinus에서 진화 한 라틴어 procrastinatus에서 유래됐다. 쉽게 말해서, 의도적으로 지연시킨다는 말이다.


'의도적으로 지연시킨다'라는 말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게으름', 또 다른 하나는 적당한 타이밍을 위한 '기다림'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적당한 때를 기다린다'라는 의미다. 호빵이 생각나는 찬바람 불 때, 차에 시동 걸고 잠시 예열한다고 보면 된다. 오랜 공회전은 오히려 차를 망치듯, 너무 오래 미루는 것도 오히려 인생을 망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함은 안 비밀이고.





이불킥 법칙
"원래 오그라드는 게 기억에 잘 남는 법이지. 이불 속 발길질."


그럴 때가 있다.

똥 싼 후에 밑을 덜 닦은 것처럼 영 찝찝한 기분이 들 때.

쪽팔린 일, 열받는 일, 손발이 오그라드는 일, 자신의 흑역사가 떠오를 때.

대부분 그런 경험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청문회만 하면 자신의 경험을 쉽게 잊는 국회의원들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벼락 치기를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은 안다.

시험 끝나자마자 금붕어처럼 3초 후 뇌를 포맷시키는 심리. 이를 두고 심리학에서는 <자이가르닉 효과(Zeigarnik effect)>라고 한다. 블루마 자아가르닉이라는 심리학자가 식당에서 밥 먹다가 발견했다. 한 번에 수많은 주문을 받고 외우는 웨이터들이 신기했나 보다. 그래서 자기에게 음식을 서빙 한 웨이터를 불러 방금 전 옆 테이블에 갖다 준 메뉴를 물어봤는데, 몰랐다고 한다.



'미완성 효과'라고도 불린다.

쉽게 말하면, 끝난 일보다 아직 덜 끝낸 일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것이다. 이는 해야 할 일을 끝내지 못하고 중단한 채 내버려 둘 경우, 미완성된 일이 머릿속에 맴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미뤄둔 시간 동안 넋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론 해야 할 일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된다. 궁극적으로 창의적인 방법으로 선택, 완성한다는 것이다.



미루면 비로소 보이는
창의성


심리학자 애덤 그랜트는 책 <오리지널스>에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탐색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일을 미룰 때 더 창의적인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고 했다. 이런 미루기 효과를 '전략적 지연'이라고 한다.


전략적인 지연 행동은 오히려 창의성을 불러온다.

심리학자 레나 수보트닉이(Rena Subotnik) 연구팀의 과학 영재 선발대회 수상자들을 대상으로 한 ‘미루기 효과’실험이 이를 증명한다. 실험 방법은 이랬다. 과학 영재 선발대회 수상자들을 대상으로 상을 받은 지 십여 년 정도 지났을 때, '사회생활', '건강 관련 행동', '일상적인 일', 그리고 '창의적인 일'을 할 때 시간을 끌었는지 확인한다.


결과는 어땠을까?

적어도 두 가지 영역에서 일을 미룬다는 응답이 68%로 나타났다. 과학 영재들은 “미루기를 과학적인 문제나 해결책을 너무 서둘러 선택하지 않고, 생각이 무르익도록 해주는 방편으로 삼았다”라고 답했다. 사고가 창의적이고 문제 해결에 뛰어난 사람들 사이에 미루는 습성은 흔한 것으로 보고한다. 전략적인 미루기는 창의적인 업무를 할 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또 다른 실험에서도 이를 증명한다.

대학 교정에 편의점이 있던 빈자리를 채울 사업 계획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써보게 했다. 한 그룹은 즉시 작업에 착수하고, 다른 한 그룹은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사업 계획 작업을 미루도록 하여 두 집단을 비교했다.


그 결과, 게임을 하며 사업 계획 작성을 미루었던 집단이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독립적인 평가단의 심사 결과 역시, 일을 미룬 사람들이 28% 더 창의적이라고 평가했다. 해야 할 일을 미루는 행위는 단순히 일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일을 하면서 머릿속으로는 작업을 완성할 다양한 방법을 생각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사고를 확장시킨다.


정리하면,

문제 해결의 의지를 지닌 전략적 지연 행동이 창의적 생각의 기회를 마련해 준다.





울엄마가 살을 쫙 뺐더라면,


35년간 수많은 창의적인 다이어트 방법들은 못 찾아냈을 것이다. 다이어트는 내일부터라며 미뤘던 행동이 결국 살 빼는 색다른 방향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된 셈이다. 다행인 점은 의사가 더 이상 살이 찌면 안 된다는 충고를 했다는 것이고, 안타까운 점은 더 이상 신박한 다이어트 방법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랄까.



창의적 글쓰기란 결국..



포기하라는 건 아니고

미루기를 전략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오늘 할 일이지만 내일로 미루면 맘이 편해진다.

마음이 편해지면 본의 아니게 아이디어가 샘솟기도 한다. 그 아이디어 중에서 쓸만한 것 하나만 건지면 된다. 그 순간, 키보드 두드리는 거 따위야 뭐가 대수겠는가.


창의적 글쓰기는

다른 사람이 한 번도 쓴 적이 없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쓰는 데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생각이 익어가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노사연의 <바램>속 가사처럼.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에필로그>
흔들리는 것들 속에서



어떻게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샴푸향이 느껴질까?


꿀벌이 실수로 꽃에 꿀 대신 샴푸를 짰으면 모를까.

아마도 좋아하는 그녀를 하루 온종일 생각하다 보니 길바닥에 흩날리는 꽃향기마저 그녀의 샴푸향인양 착각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어떻게

사과는 하필 뉴턴의 머리 위에 떨어졌을까?


잭푸르트가 떨어졌으면 어땠을까? 내가 물리 때문에 고통받지 않았을지도.

(*잭푸르트 : 세상에서 가장 큰 과일)

가만히 있는데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갑자기 떨어지는 경우가 있을까?

아마도 뉴턴은 사과나무 밑에서 사과가 흔들려 떨어질만한 어떤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어쨌든, 중력에 대한 풀리지 않는 고민을 하루 온종일 생각하다 보니 사과가 떨어진 것을 보고도 큰 깨달음(만유인력의 법칙)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독창적 생각이 완벽해질 때까지 완성을 미루다가 <최후의 만찬>을 구상하는 데만 15년이 걸렸다. 또 광학 실험이며 다른 일을 하느라 <모나리자> 그림을 16년에 걸쳐 완성했다.


그리고 나는

이 글을 구상하는 데 35년이 걸렸고,

이 글을 쓰는데 35분이면 충분했다.


그러니

지금 무언가에 쫓기는 그대여.

더 이상 초조해하거나 흔들리지 말길 바란다.

천 번 흔들리면 어쩌다 어른이 될 순 있지만,

아이의 창의성까지 같이 흔들린다는 걸 잊어선 안된다.


어른이 된다는 건
새롭지 않다는 것


- 글. 저장글 44개 보고 놀란 이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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