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을 오르내리는 여성, 그 섬뜩함과 안타까움
‘하녀’는 항상 판타지의 대상이었습니다. 전통적인 가정에서 아내가 제공하는 노동을 제공하지만 성적으로 소유하고 있지 않은 여성. 가장 친밀한 공간에 속해있으면서도 가족의 구성원이 아닌 외부인. 직업인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것은 대단히 옳지 못한 상상력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러나 매력적인 특징에 고용주와 피고용인이라는 권력 관계가 더해져, 하녀란 손에 닿을 듯 닿지 않는 기이한 판타지를 선사하는 직업여성으로 대상화되어 온 것도 사실이죠. 그렇다면 1960년 영화 <하녀> 속 여성은 어떨까요? 그녀는 어떤 판타지에 갇혀 있으며, 때로는 어떻게 그것을 부수는 인물인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실을 엮어 지은 무대에서
<하녀>의 첫장면은 재치있게도, 실뜨기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방직공장의 실로 확장되며 시작합니다. 실은 여성 인물들의 경제적 자립 수단입니다. 여직공과 청소부는 방직공장에서 일하고, 동식의 아내 역시 재봉틀로 부업을 하여 가정에 기여하고 있으니까요. 이처럼 영화에서 실이란 당시 여성들의 자립과 사회참여의 상징으로, 등장인물들이 주체성을 가지고 욕망을 펼치거나 사건에 영향력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이 됩니다. 동시에 영화 시작 부분의 실뜨기 장면은 앞으로 실처럼 얽힐 인물들의 갈등을 암시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죠.
영화는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곽이라는 여직공의 연서를 시발점으로 하여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합니다. 고지식한 피아노 선생 동식, 그와 함께 성실하게 가정을 지키고자 하는 동식의 아내, 다리가 아픈 딸, 짓궂은 아들, 적극적인 여직공 조, 공장에서 담배를 피우는 등 일탈적인 행동을 하는 하녀까지 주요 등장인물들이 빠르게 자리를 잡습니다. 이 작품의 속도감과 긴장감은 이렇게 인물들이 자기 자리를 신속하게 확보하고 그 위치에서 결여된 것을 향해 돌진하고 서로 충돌하는 과정에서 생깁니다.
그 집에 사는 여자들
무대는 공장에서 피아노 선생인 동식의 집으로 이동하고, 이제 그의 집에 들어오는 것이 허락된 여성들만이 동식가족과 더불어 주요인물로 작동합니다. 2층으로 된 양옥집은 구조 자체로 영화에 영향을 줍니다. 2층과 1층은 서로 이어져있지만 독립된 공간이죠. 동식의 서재와 하녀의 방이 2층에 있고 동식에 아내는 1층에서 일하고 잠을 자며 아이들을 돌봅니다. 2층은 동식과 그를 유혹하는 여성들이 출입하는 밀애의 공간이고 2층에서 일어나는 일은 1층에 있는 아내가 알지 못합니다. 이처럼 층계를 사이에 두고 등장인물들이 겪는 사건과 감정에 차이가 벌어지죠. 어떤 인물과 관객이 이미 아는 사실에서부터 특정 인물이 소외당하고, 정보의 부족으로 인해 위험에 빠집니다. 이렇게 정보의 차이에서 오는 긴장감 –곧 다가올 위험을 관객은 예상하지만 등장인물은 모르고 있다는 두려움 -이 영화의 서스펜스를 형성합니다.
두 층의 괴리는 계단에서 극대화됩니다. 계단은 위와 아래를 연결해주는 동시에 계단 아래는 1층, 위는 2층이라는 분리를 만드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하녀는 안주인과의 대화에서 열위에 처한 존재로서 그녀에게 복종하여 계단에서 뛰어내립니다. 반대로 권력 관계의 우위를 점했을 때는 위층에서 아래층에 안주인을 내려다보며, 동식의 딸과 계단에서 서로 바라보는 장면 역시 하녀가 위에서 그녀를 내리깔듯이 쳐다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가서는 끝을 맞이한 하녀가 다시 계단 아래로 끌려 내려오고요. 하녀뿐이 아니라 2층에 권력자인 동식에게 거역하고 그의 분노를 사는 조경희 역시 계단 위에서 폭력을 당하고 층계에서 뿌리쳐지기도 합니다. 계단에서 싸우는 장면은 2층에 남느냐, 1층으로 떨어져 죽느냐의 긴장감을 주는 사투인 동시에 인물들의 관계에서 누가 우위를 점하느냐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잠재적 권력자인 아들은 2층에서 하녀에게 ‘물을 가져오라’는 명령을 하지만 하녀는 아들의 권력에 맞서고 그 결과 아들은 계단에서 떨어져 죽기도 하죠.
한편 2층은 아내가 어지간해서 올라가지 않고 다리가 아픈 딸 역시 쉬이 올라갈 수 없는 금녀禁女의 공간 같은 성격도 가지고 있는데, 하녀만큼은 이곳을 자유로이 오갑니다. 이는 직업적 특성에 기인하는데 그녀는 초반에 남주인공이 말한 것처럼 ‘식성을 맞춰서 요리를 만들어주고 체취가 밴 옷을 빨아주고 회사에서 돌아오면 현관에서 맞아주고 언제나 손 닿을 곳에’ 있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손 닿을 곳이란 잠재적으로 가정의 주인인 가부장 남성의 손을 의미하고 하녀만은 주인의 시중을 들기 위해 여성으로서가 아닌 직업인으로서 남성의 공간에 침입할 수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여주인이 집에 없는 때 옷을 벗고 직업적 관계에서 일탈을 선언하며 섹슈얼리티를 드러냅니다. 주인-하인 관계가 남성-여성 관계로 전환되며 이때 하녀는 유혹하는 자-유혹 받는 자 관계에서 유혹하는 주체로 관계의 우위를 점하죠. 이제 그녀는 집안의 권력관계를 전복하는 ‘2층의 악녀’가 되어 군림합니다.
쥐를 잡자! 쥐를 잡자!
쥐와 여성의 관계는 영화 초반에 나타납니다. 동식의 아내와 딸 모두 한 번씩 쥐에 의해 놀라는 장면이 나오는 한편 하녀는 쥐를 두려워하지 않고 손쉽게 쥐를 잡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녀는 아내와 딸에게 공포심을 주는 쥐와 같은 존재입니다. 하녀라는 역할 위치에서 일탈한 시점에서 그녀는 집에 등장하는 불청객 쥐와 동일시됩니다. 그래서 아내와 딸이 하녀를 위협하는 도구 역시 쥐약이죠. 집안의 질서 내에 영입된 하녀라는 역할에서 벗어나 가정을 위협하는 쥐새끼같은 악녀를 단죄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벌 시도는 번번이 실패합니다. 오히려 죽음을 집행하는 위치는 가장 약자인 하녀에게 돌아가고 그녀는 안주인의 자리까지 위협하며 동식을 ‘여보’라고 부르기에 이릅니다.
쥐약은 이미 영화 초반에 ‘먹으면 사람도 죽’는 다고 제시됩니다. 딸은 반복해서 물에 쥐약을 탔으니 먹지 말라고 말하고요. 직접 제시되지 않지만 다람쥐 역시 하녀가 쥐약으로 죽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아들에게 준 물에 쥐약이 들어있지 않았다는 하녀의 말 역시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찬장 안 쥐약을 바라보는 인물 역시 화면에 자주 잡히면서 쥐약의 치명성은 관객에게 반복적으로 제시되어 긴장감을 고조시킵니다. 예를 들어 설탕물을 탄 국을 먹는 장면에서 사실을 모르는 관객은 극의 진행에 대하여 예상하여 극도의 서스펜스를 느끼게 되며, 그 예상이 깨지는 데에서 다시 한번 놀라움을 경험합니다.
그녀는 이 쥐약으로 자기의 죽음마저도 집행하고 극은 결말을 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묘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바로 모든 사건이 남자의 상상이었다는 장면입니다! 이는 영화에서 발생한 하녀의 모든 전복을 다시 전복해버리는 결과를 낳는데, 젊은 하녀는 가부장의 난폭한 상상력 속에서 “내 몸은 장난감처럼 뭘 해도 좋아요?”라는 대사처럼 소비되는 대상이자, “범에 입에 날고기”로 전락합니다. 이어서 남성화자는 관객과 대화까지 시도하는데 그가 말을 거는 상대는 여자 때문에 패가망신할 위험을 조심해야 할 남성 ‘선생’입니다. 마지막에 하녀는 문밖으로 퇴장하며 남성 관객과 남성 화자의 대화에서 소외당한 채 주체성을 박탈당합니다.
저는 김기영 감독의 영화를 좋아해서 이 작품을 여러 번 보았는데요, 볼 때마다 예상 외의 반전에 탄복해야 할지, 가부장 프레임에 복귀하는 구성에 탄식해야 할지 모르겠는 모호한 감정을 느끼곤 합니다. 결국 영화 <하녀>는 여성을 가부장의 상상에 종속되어서만 일탈적인 인물로 기능하는 '상상적 악녀 판타지'의 틀에 가두고 마니까요. 하녀가 활약할 수 있는 공간은 가부장이 지배하는 집에 한정되고, 서술자가 영화를 보는 관객을 남성 ‘선생’들로 가정하면서 그녀는 남성적 시선에 의해 대상화됩니다. 결국 여성인물은 남성의 시선 안에서 인형의 역할을 수행하고 남성의 판타지를 장식하는 존재이자 가장 낮은 존재인 하녀下女 가 되어 스크린 밖, 층계 아래로 퇴장하고 맙니다. 얼마나 섬뜩하고 안타까운지요!
참고문헌
박현선. (2000). 밀실에서 거리로? : 1960년대 한국영화의 공간과 여성. 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