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똥

by 유후용


땅 위의 모든 생명은 먹은 것을 배설한다. 우주의 신은, 의식을 배설한다. 나는 신이 싸놓은 똥이다.

배설된 똥은 분해되고, 순환의 과정을 거쳐 다시 우리의 입으로 돌아온다. 나 또한 신의 똥으로 태어나, 삶이라는 분해 과정을 따라 해체되고 있다.


처음엔 진하고 찐득했던 똥냄새는 시간이 지날수록 희석된다. 의식은 점점 파편화되고, 현실은 마취된 듯 해체되며, 삶은 조금씩 지워져 간다. 처음엔 하나의 덩어리였던 경험들이 건조한 프레임들로 갈라지며 낱낱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끔은 내 몸 안으로 들어오는 숨과, 내쉬는 숨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숨은 몸을 넘어 다른 몸으로 이어진다. 내 날숨은 타인의 들숨이 되고, 타인의 날숨은 나의 들숨이 된다.
우리는 서로 교차하며 결합하고, 다시 흩어진다. 우주의 배설은 이렇게 내 삶이라는 영화를 시작했다.

나는 영화의 일부이며, 동시에 그 영화를 지켜보는 자다.


영화라는 매체의 기원을 떠올려본다. 100년 전, 영화는 잔상 효과를 통해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사람의 눈은 사라진 이미지를 잠시나마 붙잡고 있었고, 그 잔상이 정지된 프레임들 사이를 연결했다. 초기의 필름은 간헐운동으로 작동했다. 한 프레임이 빛으로 투사되고, 그다음 프레임이 나타나기 전 아주 짧은 시간, 빛은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그래서 영화는 실은 초당 24개의 빛과 초당 24개의 어둠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어둠과 빛의 교차 속에서 세상이 탄생했다. 무극의 어둠은 양의 빛을 만나 태극이 되었다.

우리 모두는 그 세상 속에서, 언젠가 신의 몸이었던 흔적들을 주고받는다. 신이 싸놓은 똥이 보는 세계는, 잔상 속 집착의 연속이며, 영화는 밝게 이어지면서도 언제나 어둠과 조우한다.


어둠은 숨겨져 있다. 그러나 똥으로 살아가는 존재는 그 어둠의 프레임을 어렴풋이 감지한다. 현실이 점차 지워지고, 시계를 보지 않게 되고, 더 이상 아무것도 고대하지 않게 될 때, 나는 살아있는 동시에 죽어감을 본다.

움직이는 것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보인다.

이제 초점은 그 정지된 지점에 조금씩 맞춰진다. 우주의 살아있는 모든 것은 움직인다. 하지만 신의 흔적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멈춰 있다. 그렇게, 움직이는 똥과 멈춰 있는 신의 흔적은 함께 여행한다. 움직이는 똥은 노래를 부르고, 움직이지 않는 신은 그 노래를 듣는다. 그러나 이 여행은 되돌아갈 수 없다. 의식의 파편은 처음 뭉쳐 있었던 자리로 다시 가 닿을 수 없다. 멈춰 있는 신은 되돌아간다고 느낄지 모르나 그것은 착각이다.


움직이지 않는 존재는, 움직인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다. 그는 단지 멈춰 있다. 신은 스스로 똥을 눈 적이 없다. 그런데 나는 그 똥으로 태어나 여행을 하고 있다.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이 나란히 있다. 빛나는 프레임과, 그 사이 어둠의 잔상이 나란히 있다. 나는 둘 사이를 나란히 걷는다. 떠나지 않으면서 여행하고 있다.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세계를 돌아다닌다.


개똥도 오랜 시간이 흐르면 꽃이 피어나고, 나무가 되어 하늘로 솟는다. 나는 신의 똥이고, 다시 신으로 회귀하는 여정을 걷고 있다. 그 똥은 어느 어둠 속에서 아침이 오는 소리를 들었다. 사랑한다는 말이 쓴맛임을 알았고, 행복이란 엮이는 것임을 알았으며, 무언가는 반드시 한 번쯤 그르쳐져야 시간이 흐를 수 있다는 진실을 체득했다. 뭔가가 끊임없이 부서지고 폭발하지만 언제나 그대로인 눈으로 그 화염을 본다. 나는 운명의 용도를 보기 위해 보내진 신의 똥이며, 부서진 삶을 살아내기 위해 추방된 신의 흔적이다.


나는 이민자의 쉼터이고, 추방자의 배다. 신이 배설로 자신의 일부를 추방시키지 않았다면, 그것은 영원성이라는 침묵일 뿐이었을 테니까. 신은 자신이 신임을, 자신이 추방한 똥의 여행으로 비로소 겪고 본다. 나는 영화이면서, 동시에 그 영화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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