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함은 환상일 뿐이다. 세상에 영을 드러내는 고차원적인 원리라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나는 현재 살아 있으며 그뿐이다. 당신이 누구냐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모른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안다는 것은 명암 같은 것이다. 하지만 실체는 빛이 아닌 소금이다. 소금은 언제나 상대적인 농도에 불과하다. 어떤 두 가지 이상의 대상이 가진 농도의 비교 기준이 없는 이상 소금의 농도는 측정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둘의 세계에서만 살아 있다. 빛은 둘의 세계에서 감지하는 한쪽 면이다. 그래서 빛은 소금의 농도가 치환된 결과이고, 두 측면의 한쪽이다.
다른 쪽에서는 빛을 볼 수 없다. 죽음의 세계는 삶의 반대편에 있다. 삶의 세계는 모름의 세계이고, 죽음의 세계는 앎의 세계다. 죽음의 세계는 둘이 아닌 하나의 세계다. 그래서 빛도 없으며, 소금이 있지만 소금을 소금이라 인식할 수 없다.
삶은 투영된 것이다. 물그림자와 같다. 그렇다면 기원은 어디에 있나? 투영된 것을 보지 않는 존재 그 자체가 죽음이다.
물그림자에 비치지 않은 채로 단지 보고 있는 것 자체가 바로 죽음이다. 투영된 것을 보지 않을 때 나는 없고, 내가 누구인지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이며, 죽음이며, 공허다.
결국 자각이란 죽음의 상태로 삶을 보는 것이다.
나의 육체는 무생물이며, 물질이고, 그 물질은 더 작은 단위로 보면 미세한 소우주의 움직임이다. 이러한 움직임 자체가 죽음이다.
죽음은 계속된 움직임 그 자체다. 죽음은 단 한순간도 멈춘 적 없기에 단 한순간도 투영되지 않는다. 물그림자의 형상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인식을 위해서 투영된 형상의 ‘멈춤’ 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가상적 멈춤에서 바로 투영이 일어나며 그것이 삶이다. 삶은 그래서 기억하는 과정이다. 삶은 늘 잔상으로 경험한다.
죽음의 상태로 삶을 본다는 것은, 멈추지 않는 상태인 주체가 되어 가상적 멈춤과 멈추지 않음을 동시에 인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