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고 걷습니다." 걷기 명상 시간이었다. 평소처럼 눈을 뜨며 걷되, 발의 감각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명상에선 조건이 하나 붙었다. 눈을 감기. 벽 옆에 모두 한 줄로 서서 눈을 감고 걸었다. 각자의 속도가 다 다르다 보니, 앞뒤 선생님들과 살짝씩 부딪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내 몸은 '아이코' 놀래며 움츠러들었다.
분명히 벽을 짚으며 걸었는데, 어느 순간 벽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손으로 이리저리 휘적거려 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무서웠다. 의지할 곳 하나 없이 걸어야 한다는 게. 안전하다는 걸 알면서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원초적인 두려운 마음도 올라왔다.
하지만 계속 걸어야 했다. 안정감을 주는 벽이 없다고 해서 걸음을 멈출 순 없었다. 무언가, 누군가 부딪칠 수 있는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저 발이 이끄는 대로 한 걸음씩 내디뎠다. 근데 왜일까, '예측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니 이상하게 자유로워졌다. 벽과 부딪치면 '아, 벽이구나'하고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돌렸고, 일부러 익숙하지 않은 쪽으로 걸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내 몸과 마음은 여전히 경직되고 조심스러운 상태였다. 탁-. 그 순간 어떤 선생님과 부딪쳤다. 선생님은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이 내 팔을 다정하게 감싸줬다. 그 따뜻했던 온기가 두려움으로 단단하게 굳어있던 나를 녹여줬다.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처음 누군가와 부딪쳤을 때 화들짝 놀라며 피했던 나였다. 혹시나 불편함을 줄까 봐 몸을 사렸던 나였다. 그런 나에게 그럴 필요 없다고, 괜찮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 후로도 마주치던 여러 선생님이 저마다의 온기를 나눠줬다. 손을 잡아주기도 팔을 감싸주기도 했다. 용기가 생겼다. 내가 받은 이 온기를 나눠주고 싶어졌다. 조심스럽지만 마주치는 선생님들의 손이나 팔을 온 마음 다해 잡았다. 누군가 우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괜찮아지기를 기도하며 마음으로 사랑을 보냈다.
불확실하고 두려웠던 그 공간이 안전하고 따뜻한 공간이라는 걸 알게 되자, 어둠 속에 있는데도 몸과 마음은 환한 빛으로 채워졌다. 각자가 나눠준 온기 덕분에 용기 내어 끝까지 걸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나를 스쳐 지나가도 괜찮았다. 지나가면서 잠시 머무르는 그 존재의 온기만으로도 힘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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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이 경험이 삶에서의 나와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늘 불확실한 미래를 불안해하고 두려워했으니까. 무언가 해야 할 일들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뭐라도 하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은 불안함을 느끼곤 했다. 내 앞에 벽을 만나면 다른 길로 갈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붙잡고만 있었다.
사람과의 관계나 사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나와는 다른 마음이지 않을까, 불편해하진 않을까, 내가 상처받진 않을까 두려워하며 쉽게 움츠러들곤 했다. 모든 인연이 자연스레 오고 간다는 걸 알면서도 이별은 여전히 못 견뎌했다. 마음속엔 떠나는 사람들을 붙잡고만 있는 내가 있었다.
걷기 명상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삶에선 불확실하고 알 수 없는 것들을 견뎌야 하는 상황이 연속적으로 온다. 가끔은 망망대해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외롭고 무서울 때도 있다. 도무지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은 벽을 만나면 무력감을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그렇듯, 어둠이 있으면 빛을 보여준다. 지금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려준다. 묵묵히 견디다 보면 견고해 보였던 그 벽이 무너질 때도 있고, 다른 방향으로 틀었을 때 더 나은 길이 있다는 걸 알려주기도 한다. 누군가는 오고 누군가는 떠나더라도, 그들이 머물렀던 온기만으로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한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진 아무도 모른다. 불확실한 미래에 자꾸만 불안해질 때면 그저 내 발이 이끄는 대로, 한 걸음씩 내디디면 된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모름에서 오는 자유로움'을 느낄 수도 있다.
홀로 외딴섬처럼 느껴질 때면 내 곁에 머물렀던 온기들을 기억해 본다. 그 존재들을 마음속 지지대로 삼으면서 다시 내 길을 걸어가 본다. 다시 사람에게 다가가 본다. 그렇게 한 걸음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