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랑지 Sep 03. 2022

살아 갈수록 닮아 가는 거 아니었어?

주말 아침

하늘은 저 멀리 높아 있었고 바람은 시원하게 내 볼을 간지럽혔다. 매번 오는 주말이지만 오랜만에 심적인 여유가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지난여름 무주 시누이가 보내준 옥수수를 넣어서 달큼하게 지은 밥을 해 먹은 후라 그런지 만족감도 좋았다.

주방을 정리하고 음식물쓰레기를 버리고 온 후 나는 딸아이를 통해 남편이 내 험담을 했다는 것을 들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물었다.


"뭐랬는데?"

"엄마가 할머니(친정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빠보다 못 하대"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시골(남편의 고향)에서 채소나 작물을 가져와도 바로 안 갔다 드리고 전화도 자주 안 한다는 거야. 항상 아빠가 먼저 처갓집 가자고 한다면서."


사실이었다.

시댁에 갈 때마다 풍성한 채소는 자동차 트렁크에 바리바리 쌓여서 가져온다. 시어머니는 오로지 자식들 먹거리를 해내기 위한 사명을 갖고 계신 분 답게 시댁을 방문할 때마다 채소의 종류가 농산물 시장 판매대를 방불케 할 만큼 채워 주신다.

나는 어마어마한 양에 질려버리지만 남편은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혹시라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반쯤 물러진 상추까지 주시는대로 넣고 온다.

가져온 채소는 남편이 일하는 사무실의 여러 사람들과 나누기도 하고 우선은 처갓집에 갖다 드릴 것을 빼놓자고 하면서 챙긴다.

고맙다.

하지만 시댁에서 몸과 마음이 지친 나는 당장 1시간 거리에 있는 친정에 선뜻 가지지 않는다.

엄마가 이 채소만 간절히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엄마와 오빠 두 분이 드시는 식생활이기에 이 채소가 당장 시급한 것도 아닌 탓이기도 했다.

친정엄마 동네 이웃도 요즘은 주말농장을 하는 분들이 늘어서 가끔 주시는 찬들로도 넘쳐나기 때문이다.

조금은 쉬었다가 평일 퇴근 후 혼자 다녀올 심산으로 미루기도 한 것은 사실이나 남편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친정엄마나 형제자매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남편은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를 때면 늦은 시각에도 형제들에게 전화를 돌려 사랑한다며 고백하는 성격이다.

나는 오글거리는 귓가를 문지르며 방문을 조용히 닫는다.

남편이 자기 형제들과 사랑한다, 내 동생이라 고맙다, 내 형이라 감사하다, 라는 닭살 멘트를 주고받을 때

나는 우리 남매 단톡방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잘할 거라고 격려를 해주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렇게 결이 다른 나와 남편이기에 표현하고 소통하는 방식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평일 낮 점심시간을 전후로 친정엄마와 수다를 하는지, 주말 시간에 여동생과 통화를 하며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면 될 일을 남편은 내게 부모형제를 거들떠도 안 보는 사람으로 딸에게 흉을 본 것이다. 부화가 치밀고 자존심도 상했다. 뭔지 모르게 무시당한 느낌마저 들어서 잠시도 한 공간에서 버틸 수 없는 느낌이 몰려왔다. 급기야는 내가 시어머니께 자주 연락하지 않을 걸 서운해서 다른 방법으로 비꼬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차를 몰고 무작정 나왔다.

빈곤한 내 연락처에는 딱히 부르고 싶은 사람도 없고 주말에 나와줄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혼자된 기분은 쓸쓸하기도 했고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도 갖게 했다.

정원이 잘 꾸며진 카페 나무 아래 앉았다. 이른 시간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서 차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철저하게 나 혼자된 기분은 더했다.


분위기 방방 띄우는 성격도 아니고 주어진 내 역할에 묵묵히 삶을 수행하듯 헤쳐 나온 나에게 이런 말이 들릴 때면 그동안 내가 쌓아온 내 삶의 의미가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다.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하던 사업이 망해서 우리 집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나와 동생들은 큰집에 맡겨졌고, 엄마와 아버지는 채권자들을 피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피신해 있었다.

밤마다 빚을 독촉하는 사람들의 고함소리와 욕설을 들으며 동생을 끌어안고 큰집의 제방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나는 사회에 나와 쓰러진 우리 집의 식구들이 한집에서 살기까지 혹독한 고생을 해야 했다. 그런 내게 부모의 향한 마음이나 남매에 대한 우애를 따지는 남편이 야속하고 지나온 내 삶을 함부로 돌팔매질을 한 것 같아서 속이 상했다.

나와 다른 결을 가진 사람을 인정해주는 것이 어려운 일일까.


남편은 장점이 정말 많은 사람이다. 태생이 부지런하고 건강해서 하고자 하는 일에 두려움이 없다. 본인이 옳고 바른 일에는 어떤 걸림돌도 문제 되지 않을 만큼 추진력과 긍정의 사고방식이 있어왔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들을 보면 그냥 모른 체하지 않기에 주위에 사람도 많고 의지하는 사람도 많다.

그 모든 걸 다 받아내고 기꺼이 헤쳐나가는 생활력 갑이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모든 사람들, 특히 가족(아내, 딸)에게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강요하고 그러지 못할 땐 이해하지 못한다.


상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다른 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100미터를 15초에 뛰는 사람도 있고 20초에 뛰는 사람도 있다는 걸 인정해 주면 좋을 텐데.

내가 남편을 인정하고 존중하듯이 남편도 내 성격을 존중해주길 바라는 게 큰 욕심일까.

작가의 이전글 소나무그림vs고구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