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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지 Oct 10. 2022

사람의 온기

목회를 하는 시동생의 별명은 맥가이버다. 전문가만이 할 수 있는 작업들을 도구 몇 개로 뚝딱 해낸다. 몇 년 전 개척교회를 시작한 시동생은 교회의 개보수를 오로지 혼자 힘으로 해낸 사람이기도 하다. 내부 인테리어며 정수기 설치는 손쉽게 해낼뿐더러, 에어컨 실외기 설치와 연결까지 전문가가 찾지 못해 끙끙대던 문제까지 해결하고야 마는 사람이다. 우리 집 싱크대 배관에 실금이 가서 물이 뚝뚝 흘러내릴 때도 시동생이 연장통을 들고 와서 부속하나 교체하고 깔끔하게 해결을 해주고 갔다. 나는 아랫집에 혹시 누수가 발생할까 봐 누수탐지 전문가를 불러야 하나 하고 시동생에게 사진을 보냈더니 "형수님 그거 제가 가서 해드릴게요. 금방 해요" 라며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말했고 또 그렇게 해결을 해주곤 했다. 

5분 거리에 사는 시동생은 본인 집과 형님 집을 오가며 소소하게 일어나는 문제를(우리는 큰 문제라고 느끼지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쉽게 해결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갑자기 건조기를 옮기겠다는 것이다. 우리 집 건조기로 말할 것 같으면 건조기가 생뚱맞게 거실 한쪽에 있어서 볼 때마다 우두커니 있는 건조기가 뻘쭘해 보이긴 했다. 그래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았는데 시동생은 그걸 또 건드리기 시작했다. 건조기를 구매하기 전에 설치되어 있던 베란다 수납장을 드르륵 하며 깎아내더니 세탁기와 동선을 맞춰서 바로 옆으로 옮겨준 것이다.

말이 쉽지 연장이며 옮기는 작업이 만만치 않을 거라 엄두를 못 냈는데 역시나 시동생은 쉽게 해결을 해주고 갔다.


문제는 건조기를 옮기려니 베란다에 묵혀둔 오래된 살림을 다 정리해야 했다. 이사 와서 한두 번 쓸까 말까 했던 플라스틱 통, 등산 갈 때 커피를 넣어간다며 어디서 받았는지 모를 보온 통, 아이들 어릴 때 곧잘 가던 소풍에 갖가지 음식을 담아가곤 했던 찬합들, 인사동에서 전통차를 마시겠다며 사온 다기 세트, 행사 때마다 받아온 장바구니며 쟁반 세트며 플라스틱 세트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베란다에 묵혀둔 살림은 살림이 아니라 그냥 거대한 쓰레기통 같았다. 언젠가 쓰겠다고, 언젠가 꼭 필요할 거라고 뒀던 것들인데 정작 필요할 땐 다른 것으로 대체되고 그렇게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쌓여있는 먼지. 

쓰지도 않고 가만 놔두었는데도 먼지는 닦아도 닦아도 묻어 나왔다. 먼지는 어디서 쌓였을까. 문을 닫아둔 곳도, 열어둔 곳도 예외 없었다. 사람 손길이 닿지도 않은 곳인데도 이렇게 먼지가 쌓일 일인가 싶다.



사람 손길뿐이랴 발길이 닿지 않는 곳도 마찬가지다.

아파트 뒷길은 전철역으로 가는 방향으로 도로가 깔끔하게 잘 만들어져 있다. 몇 해 전 그 길은 사실 그리 잘 다듬어진 길이 아니었다. 전철이 지나가는 철로 아래로 사람들이 겨우 지나가게끔 좁았다. 누군가가 가로등을 요청해서 가로등을 설치하긴 했지만  어두워지면 무심코 뒤를 돌아보게 하는 길이었다. 사고가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밤길은 여전히 무서운 곳이었다. 그랬던 곳을 지자체의 시공으로 빈 공간을 확장해 넓고 환하게 자전거와 사람들이 자유자재로 다닐 수 있게 만들어 줬다. 

바쁘게 걷던 나는 문득 예전에 다니던 길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분명 내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다니던 길이 있었는데, 그 작고 소박한 길은 온 데 간데 없어지고 잡초가 무성한 정글 숲이 되어 있었다. 그 길은 이제 누구도 걷지 않는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그곳은 시멘트도 뚫고 나오는 식물의 땅이 되어 가고 있었다. 

사람의 손과 발이 이토록 무서운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 



손길이 닿지 않는 베란다의 먼지.

발길이 닿지 않는 좁은 길의 잡초.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의 허물어짐.

사람의 온기와 손길이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이라는 게 느껴졌다. 



문득,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람과 사람이 마음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그 마음속에 어떤 불순물이 낄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그의 마음을 닦아주고 그가 나의 마음을 빛내 주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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