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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지 Jul 14. 2023

그 기쁨이 일주일 치 라고요?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던 남편은 두 딸에게 다그치듯 선언했다. "기한은 6월 말까지로 줄게, 그 이후 취업이 되든 안되든 독립을 해." 좋아하는 오이지 반찬을 아삭거리며 흡족해하던 딸의 눈빛은 '아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군' 하는 표정이었다. '네 알겠습니다'라든가, '방은 구해주실 거죠'라는 대답이나 질문도 없이 달력을 올려다보았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던 우리들은 겨우 식사를 마치곤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길어봐야 3주 정도 남은 기간 동안 취업이 당장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방을 바로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았다. 사실 독립이란 말도 예전부터 내가 해왔던 말인데 이번에 남편이 딸들에게 하는 뉘앙스는 내가 말할 때와는 사뭇 달랐다. 



대학 4년을 지방의 먼 대학으로 통학버스를 타고 다녔던 딸에게 우린 자취방을 구해주지 않았다. 1학년때는 성적 우수자를 우선대상으로 기숙학생을 선발할 때인데 수시전형으로 운 좋게 들어간 때문인지 숙사배정도 안 됐었다. 고지식한 나와 남편은 지방의 자취생 방은 친구들 숙소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더욱 자취를 못하게 했다. 그렇게 힘들게 학업과 통학을 묵묵히 해낸 딸은 졸업과 동시에 집에만 틀어 박혀 버리고 말았다. 능력은 없고, 취업은 더더욱 힘들었다. 2년의 세월을 허송하게 보내놓고 나니 이젠 둘째 딸까지 취준생에 합류했다. 4년 성적우수 장학생이었고 토익도 만점에 가깝게 따놓은 상태라 취업이 금방 될 줄 알았다. 실제로 금융권의 면접은 최종까지 가기를 몇 차례 했지만 그때마다 쉽지 않았다. 두 딸의 멘털이 탈 탈 털릴 때쯤부터 우리 부부의 잔소리는 매일 아침 귀에 못이 박히게 시작되었다. 달래도 보고 겁도 줘보고 지인 찬스로 대기업계열사에 낙하산으로도 보내봤다. 결국은 본인이 원하는 자리와 일이 아니었던 큰딸은 몇 개월 힘들게 다닌 회사에 사표를 내고 기나긴 시간 또다시 동굴 속에서 칩거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6월 말 까지라는 기한을 말할 때만 해도 설마 아직 아무것도 준비 안된 애들을 더군다나 딸들을 험난한 세상에 내몰기야 하겠어?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지나갔다. 출근을 하는 우리 부부는 비몽사몽인 딸들을 깨우는 일부터 해서 운동하라 공부하라 끊임없이 잔소리를 퍼부어댔다. 잘 알아서 하고 있다고 하지만 눈에 보이는 건 게으른 모습뿐이었다. 퇴근하고 돌아온 집안의 모습은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의 몇 곱절이 되어 나에게 돌아왔다. 나도 모르게 딸들에게 집안일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 혼자 사는 집이야?" 

"밥을 먹었으면 설거지는 해놔야 하는 거 아니야?"

"갈아입은 옷은 세탁기 앞에 갖다 놓는 게 그렇게 힘들어?"

"손발이 발발 떨리는데 밥통에 밥이 없으면 쌀이라도 좀 씻어 놓기라도 해야지?"

우당탕탕 거리며 설거지를 하고 나면 나도 모르게 얼굴에 열이 확 올라왔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은 하루 걸러 하루씩 내 머리를 쥐어뜯었다. 소화도 되지 않았다. 늘 배를 움켜쥐고 화장실을 들락 거렸다. 어떤 음식도 먹고 싶지 않았고, 어떤 모임에서도 마음이 불편했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내 딸들의 모습이 들킬까 봐 전전긍긍했었는지도 모른다. 



6월 말의 기한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며칠 차이로 두 딸의 취업소식이 전해졌다. 믿기 힘들었다. 한 명이라도 취업에 성공한 것도 감사할 일이었는데 두 명이 한꺼번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오랜 기다림의 시간들을 때로는 묵묵히 때로는 내 감정을 모두 쏟아내듯 지나왔던 시간이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갑자기 내 어깨에 날개가 돋친 듯 가벼워졌다.  큰딸은 전공 분야의 취업이 됐는데 지역이 멀다 보니 오가는 출퇴근 시간만 해도 3시간 반에서 4시간 예상이었다. 6시에 일어나서 40분에는 무조건 집을 나서야 했다. 그래도 본인이 원하는 곳이라서 깨우지 않아도 바로바로 일어났다. 작은 딸은 아직은 인턴이지만 공기업이라 그런지 복지나 근무조건은 두말할 것 없이 좋았다. 심지어 회사가 바로 집 앞!


6시에 함께 일어나 계란 프라이라도 해줘야 맘이 편했다. 한 날은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전철역까지 태워다 주고 왔다. 그리곤 나도 출근 준비를 하려니 전철에서 펼쳐든 책은 한 장도 넘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았다. 퇴근 후 저녁 준비도 딸아이들이 좋아하는 메뉴를 정하고 만들기 시작했다. 퇴근하면서 마트까지 들러 책가방에 도시락 가방에 우산까지 든 나는 또 마트 장바구니까지 극한직업인이 따로 없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우리 딸들이 이제야 사람다운 모습으로 세상에 한 곳에서 떳떳하게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거지가 쌓여도 이젠 룰루랄라 휘파람을 불어대며 앞치마를 질끈 동여맸다. 퇴근하는 딸이 비 온다고 하기에 전철역으로 데리러 갔다. 오지 말라고 하는데도 어디서 힘이 나는지 지하 주차장으로 뛰어가 차를 몰곤 한다. 출근할 때 입을 옷을 코디하며 깔깔대는 딸들과 함께 하면서 늦은 시간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딸들이 출근을 시작한 후 일주일이 지난 그다음 주 월요일부터 나는 컨디션 난조가 오기 시작했다. 밤 10시면 온몸을 부르르 떨며 소파에서 꾸벅거리던 내가 밤늦게까지 잠도 안 자고 새벽에 일어나 차량운행까지 하다 보니 몸에 탈이 나기 시작했다. 일주일 동안 한 번도 없던 두통은 일주일 후 여지없이 찾아왔다. 그 기쁨은 지난 몇 년 동안의 걱정에 비해 너무 초라한 기쁨이었나 보다. 


2주 차가 되어 가는 지금, 딸들에게 저녁마다 회사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듣는 게 일상이 되었다. 

대표가 자기한테 "이제 학생 아니잖아요. 이런 건 알아서 해야죠"라고 했다거나, 그러면서 금방 또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대표를 미워할 수 없다고 하는 푸념을 듣는다. 엄마인 내가 흥분해서 대표를 뭐라고 하면 듣고 있던 딸은 또 대표의 장점을 나열하면서 좋은 사람이라고 두둔하기도 한다. 



자녀들의 취업이 안 되는 기간 동안 나는 무척이나 자책했다. 엄마가 모든 걸 다 해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다 해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어마무시하게 가슴을 짓눌렀다. 엄마가 무슨 철인 3종 선수도 아니건만, 엄마는 모든 걸 다 해내야 하는 강한 의지의 엄마로 나를 몰아세웠다. 지방에 있는 연수원에 최종면접을 보러 가는 딸을 데려다주느라 연차를 쓰기도 했고, 내가 근무하는 회사 근처에 면접을 보러 올 때마다 한우된장국이며 돈가스를 사주며 토닥였다. 그런 시간이 헛되지 않으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은 있었지만 동아줄 같은 믿음은 없었던지 나름대로 속은 속대로 탔었다. 몇 년의 시간은 이제 한 순간이 되었다. 지나온 시간만큼 또 앞으로의 시간들 속에서 삶을 이어가겠지. 이제는 나 또한 짐을 내려놓고 그들의 앞날에 한 발 옆에서 서서 지켜봐 주고 싶다. 몇 년의 걱정이 단 일주일 밖에 안 되는 기쁨으로 대체된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묵묵히 옆에서 딸 편이 되어 주고 싶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옷도 젖고 신발도 젖어가면서 세상에 스며드는 딸이 되기를. 이 엄마는 굵은 동아줄 같은 믿음을 단단히 묶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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