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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S Jan 07. 2022

다시 만난 세계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서일까. 이십 대 중반 지적 허영에 잔뜩 홀려있던 시절 처음 봤던 책을 다시 펼쳤다.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시에는 조르바가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냥 특이한 사람 정도로 느껴졌다. 게다가 당시엔 워낙 인문학 열풍이 거셌던 시기여서 독서 애호가 대부분이 추천하는 도서로 꼽혔기 때문에 반골 기질에 괴상한 힙스터 기질까지 더해졌던 나에겐 매력적인 책이 아니었다. 서른 중반, 소설 속 화자의 나이와 동일해진 이후에야 책이 다르게 보였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과거의 내가 부끄럽게 여겨질 정도로 조르바에 매료됐다. 읽다가 육성으로 웃음이 터져 나오는 소설을 읽었던 게 언제였을까. 읽으면서 조르바가 한 마디라도 더 해주길 바라면서 아쉽게 책장을 넘겼다. 책이란 독자의 환경에 따라 달리 받아들여진다는 말을 다시 한번 절감하며, 내가 모르는 수많은 진귀한 책들에 대한 아득한 감정이 스쳐간다.


소설  화자인 ‘ 이제  절친한 친구와 헤어졌다. 형이상학적 진리 탐구에 몰두한 나는 정신적 가치를 숭배한다. 끊임없이 읽고 쓴다. 세상의 진리란  속에 다 여기며 끊임없는 성찰과 사유로 붓다가 다다른 진리에 이르고자 애쓰고 있다. 자신의 이상점으로 생각했던 친구와의 헤어짐은 꽤나 깊은 상념에 젖게 만들지만 이내 조르바라는 괴짜 노인을 만나며 일련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조르바는 욕망의 화신이다. 디오니소스의 현신이랄까. 소설 속 나와 정확히 대척점에 있는 실재하는 인간이자 순간의 현실에 충실한 무뢰한이자 로맨티시스트다. 육십 대 노인에게 팔팔한 정신과 육체라, 거침없지만 유머러스한 대화는 그와의 식사 시간이 조금 더 길어지길 바랄 정도로 재미있다. “이보쇼, 보스 양반,”으로 시작하는 술냄새 풀풀 나는 노인의 우격다짐에 왜 홀리는 걸까.


‘나’가 조르바를 만나 변화하는 과정, 양 극단의 가치관을 지닌 사람이 서로의 세계관에 매료되는 과정은 독자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 책에 파묻혀 지내는 나에게 일갈하는 조르바의 인생 학교랄까. 처음엔 일자무식 노인인 줄만 알았으나 갈탄 광산에서 사람을 부리는 카리스마와 매일의 식사시간에서 수 없이 쏟아내는 이야기는 범상치 않다. 짧은 이야기 속에는 그가 살아온 세월이 녹아있다. 야생의 지혜, 자신의 욕망에 반하는 것이라면 제 손가락까지 절단해버리는 광인 조르바가 나는 점점 궁금해진다. 거친 삶을 살아온 조르바에 있어 신 따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오로지 자신이 경험한 것을 진리로 여기며 그것은 언제든 수정될 여지가 있다. 신과 악마가 아닌 사람에 대한 공포를 마주한 조르바는 전쟁에 참여한 자신의 모습에서 환멸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존재에 대한 내적 탐구보다는 ‘살아있음’에 대한 순간에 충실한다. 마을의 늙은 마담 오르탕스가 옆에 없을 때면 심할 정도로 모진 발언을 내뱉지만, 그녀의 옆에서는 누구보다 충실한 친구이자, 남편으로 변한다. 죽음이라는 공통의 도착점에 한발 짝 나아가는 자신의 삶을 도저히 내버려 둘 수 없다는 듯이 산다. 갈탄 광산에선 갈탄이 되면 되는 것이고, 포도주를 마실 때면 포도주가 되면 된다는 말은 찰나의 순간조차 백 퍼센트의 에너지를 쏟아붓겠다는 조르바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이다.


늘 어딘가 매여 있는 우리의 삶은 조르바를 열망할 수밖에 없다. 삶을 영위하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우리는 매여있다. 말뚝에 매여 있으면 말뚝에 달린 밧줄이 허용하는 만큼이 이동 반경이 된다. 지상의 모든 것들을 느끼기 위한 뱀 같다는 묘사처럼 조르바는 이 땅의 모든 것을 느끼려는 사람이다. 매여 있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말뚝을 뽑고 저 멀리 가버린다. 크레타에서의 만남은 나와 조르바 서로가 서로에게 감화되는 과정이다. 정신과 육체,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처럼 극단에 있는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절대 고울 수 없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겪는 섬에서 일련의 사건들은 서로의 세계로 향하게 되는 과정이다. 마지막 광산 케이블카 설치를 실패하면서 모든 재산을 날려버린 후 바닷가에서 미친 듯 춤을 추는 두 주인공의 모습은 뜨거운 감동을 일으킨다. 나는 여태까지 삶에 어떤 가이드를 해 줄 수 있는 멘토를 만나기를 꿈꿔왔다. 화자 ‘나’가 처음 상정해놓았던 진리처럼 어떤 이상적 인간을 만들어 그를 만나 삶에 지침을 사사하기를 고대해왔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냉혹한 현실은 운신의 폭을 좁혔고, 인간관계를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책 속의 ‘나’처럼 저만의 세계에 몰두해왔다. 이번에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며 화자가 아닌 조르바에 이입했다. 멘토를 찾지 못했다면 내가 누군가의 멘토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건방지지만 작은 소망을 꿈꿨다. 카잔차키스가 실제 조르바를 만난 후 그의 나이가 되어서 책을 펴낸 듯이 화자의 나이에 이르러서 다시 만난 <그리스인 조르바>는 나의 먼 미래를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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