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토니 타키타니>
한때 평생을 혼자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부모 형제와 떨어져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서,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 살아가는 나를 상상했다. 빛을 차단한 어두운 방에서 계속해서 재생되는 영화와 쌓여있는 책들, 한쪽 방에 우두커니 정렬되어 있는 내 옷가지들만이 내가 누구인지 설명한다. 영화 속 토니의 삶이 그랬다. 정밀한 기계처럼 정확하고 딱 맞아떨어지는 논리와 이론만을 추종한다. 그에게 인간의 감정이란 불가해한 것이었다. 명확히 설명될 수 없는 것에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아름답지 못하다 여긴다. 보통의 하루키의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적당한 능력에 비해 비교적 여유로운 소득이 있으며 특별하지만 거창하지 않은 취미가 있는, 종종 스쳐가는 여자들이 있지만 깊은 관계로 발전하지 못한다. 겉보기에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 삶에 무언가 결여된 것이 있다. 지루할 정도로 단조로운 삶에 균열이 일어날 수 있을까. 고독이란 단단한 벽이라 여겼던 적이 있다. 마치 감옥처럼, 자신 스스로가 내린 형벌처럼 외부와의 소통을 차단한 채 끝없이 나에게로 침잠한다. 이게 나라고, 이 상태가 편하다고 스스로를 세뇌한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 놓인 작은 밧줄 위를 걷는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과 반대로 작고 단단한 그 세계는 너무나 쉽게 파열될 수 있다. 고독은 인간을 깨트린다. 깨지기 쉬운 인간에게 고독이란 치명적이다.
스스로를 가둔 토니에게 있어 고독이란 선택이었다. 생존을 위한 선택, 아버지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특이한 이름을 지닌 그에게 있어 혼자란 가장 안전한 상태였다. 주변의 이념과 사상이란 그의 세계에 닿지 못하는 소음이었다. 이토록 단단한 그의 세계에 너무나 쉽게 들어온 여자가 있다. 그녀를 향한 사랑, 설명할 수 없는 것이 그를 움직인다. 열다섯의 나이차, 그녀 스스로 과할 정도의 사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 따위 토니에게 상관할 바가 아니다. 고독의 세계가 깨어졌다. 그녀가 행여 사라질까 불안해하는 토니, 겉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아내 에이코 역시 결핍이 존재했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에 수많은 옷가지와 신발을 채워 본다. 토니는 그런 그녀를 바라볼 뿐이다. 텅 빈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 보기 두렵다. 혹여나 사라질까 하는 두려움에서였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욕망에 산화된 그녀는 토니를 다시 홀로 남겼다. 한쪽 방에 무수히 남겨놓은 그녀의 그림자들은 그를 위로해주는 것 같지만 동시에 그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떠나간 아내를 대신할 누군가를 구하는 토니, 그녀가 남긴 옷과 신발을 대신 입고 자신의 주변에 머물기를 바란다. 괴상하게 보이는 행동에 의심을 품지만 결국 조건을 받아들이는 다른 여인 히사코는 옷방에서 오열한다. 지독한 고독의 냄새 때문이었을까. 이윽고 의뢰를 취소하는 토니, 아버지까지 떠나보낸 그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아내의 옷도 모두 처분해버렸다. 텅 빈 방에 모로 누워 그녀를 떠올린다. 아내의 옷에 둘러싸여 오열했던 여자를.
원작의 변형 없이 거의 그대로를 옮겨온 대사와 느린 카메라 워크, 흑백에 가까운 건조한 화면 그리고 부드러운 피아노 선율은 지독한 고독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삶에 희노애락오욕이 존재하듯, 고독이라는 조각을 조심스레 들어내 깊이 들여다본 영화가 아닐까. 아슬아슬한 삶을 버텨내기 위해 반드시 대면해야 할 감정에 대해,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또는 그런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파스텔톤 허무 맹랑한 조언이나 공감이 아닌 오직 깊은 이해로만 가닿을 수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어떤 지점에 대해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