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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S Nov 04. 2022

내가 살던 집

최초의 기억에 내가 살던 집은 반지하였다. 짙은 녹색 문 모서리에 갈색 녹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고 여닫을 때는 항상 기분 나쁜 소리가 났다. 내 부모는 방 한 칸 좁디좁은 방에서 나와 동생을 낳으며 시작했다. 동네는 비슷한 처지의 가정들이 있었다.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시급한 사람들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피자를 처음 먹어봤다. 친구의 생일에 초대받아 갔던 프랜차이즈 식당은 내 생에 최초의 충격이었다. 그즈음에 깨달았던 것 같다.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부모님은 모두 가난했지만 서로의 가치관이 달랐다. 그로 인한 다툼은 꽤 자주 일어났다. 머리가 커지기 전부터 나는 새벽에 자주 잠을 설쳤다. 서로의 의견을 좁히지 못했던 부모님은 결국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 동생과 나는 누구를 따라갈지 결정해야 했다. 어머니는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현명한 사람이었다. 자신을 선택한 동생과 나를 위해 당신의 젊음을 모두 소진했다. 그녀의 가르침에 의해 오로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 공부임을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나는 천재도 영재도 아니었다. 투입한 만큼의 결과가 나오는 범재였다. 나는 나와 비슷한 수준의 친구들을 사귀었고, 서로의 가정환경을 어렴풋하게 파악했다. 오직 대기업 입사만이 고단한 삶을 구원할 길이라 여겼다. 엄마 친구 아들이 S기업에 입사했다는 소식을 건너들 었다. 대기업 입사, 꽃가루가 휘날리는 파이널 라인을 상상하며 지친 마음을 달랬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나는 염원하던 그곳에 입사하지 못했다. 수많은 입사 원서를 낸 곳 중 합격한 기업에 입사했다. 가족들은 기뻐했지만 나는 두려웠다.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임을 어렴풋이 느꼈기에. 


입사 1년 차에 남아 있던 학자금 대출을 모두 상환했다. 이 역시 또 다른 시작이었다. 회사 근처 오피스텔에서 50만 원 남짓 월세살이를 시작했다. 8평 남짓 작은 공간에서 꿈이란 사치였다. 내 미래는 회사에 이미 존재했다. 팔은 앙상하고 배는 불룩하게 튀어나온 머리가 벗어진 아저씨의 모습. 책임을 회피하고 공을 빼앗으며 자신의 생존을 위해(각자 책임진 가정을 위해) 처절하게 허우적거리는 남자. 매일 새벽이 두려웠다. 속이 메스껍고 두통에 시달렸다. 나는 1년 3개월 만에 퇴사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안정적인 월급쟁이가 되는 것뿐이었다. 운 좋게 올라온 공고에 지원했고, 합격했다.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잠깐이나마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이 즈음에 내 앞으로 남겨진 돈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할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재산이었다. 경기도 외곽 꽤 넓은 전답을 가지고 있던 할아버지는 언제부터인지 이단 종교에 빠지게 되었다. 건너 들은 이야기로는 꽤 높은 직책까지 역임했다고 들었다. 종교에 대부분의 재산을 헌납하고 남은 얼마 안 되는 재산은 자식과 손자들에게 돌아갔고 그것이 나에게까지 흘러왔던 것이다. 내게 주어진 몫은 천만 원 남짓의 돈이었다. 목돈이 생긴 나는 월세로 살던 작은 평수 아파트를 구매했다. 내 명의로 된 집이 생긴 일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안정적인 직장과 주택은 내게 족쇄와 같았다. 매달 갚아야 할 대출과 카드값이 내 존재의 이유였다. 나는 살아있는 유기체가 아닌 몇 자리 숫자로 대체되는 사람이었다. 대학 동기 누가 외제차를 뽑았고, 어디 유럽 여행을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무렵 SNS를 삭제했다. 나는 하루키 소설 속 주인공처럼 조용히 살았고, 적게 먹었다. 몇 번의 연애는 진지하지 못했으며, 가벼운 하루를 살았다. 퇴근 후 책을 보거나 영화를 봤고 가끔 글을 끄적였다. 


그런 가운데 한 사람을 만났다. 평온한 호수 같은 사람이었다. 여전히 금슬이 좋은 부모님, 평범한 가정,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여자였다. 자꾸 내 이야기를 털어놓게 됐다. 위로나 손길이 아닌 옆 자리에서 한참을 고개 숙이고 내 말을 들어주었다. 알량한 위로가 아닌 존재로서 위로를 주는 사람이었다. 겁이 많고 소심하지만 내면의 평온함으로 불안한 내 마음을 감싸주었다. 사 년간의 연애가 평온하지 만은 않았다. 몇 번의 다툼은 나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 사람인지에 대해, 글로 떠들어대는 이상과 전혀 다른 인간임을 깨닫게 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즈음에 그녀와 결혼을 약속했다. 바쁜 일정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했다. 서로의 말투를 닮아갔다. 서로의 성격이 뒤바뀐 듯 행동하기도 했다. 그즈음에 나는 아파트 청약에 당첨됐다.


전에 비해 넓어진 집 침대에 누워있으면 가끔 예전의 집들이 떠오른다. 밤늦게 들렸던 한숨소리와 떠다니는 걱정들. 높은 이상과 시궁창 같은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괴로움. 좁은 방구석에서 오롯이 혼자 감내해야 했던 고독. 나를 성장시키는 양분이자 내 정신을 갉아먹는 독이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나는 평생 혼자 살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삶을. 이제는 아내가 된 사람과 함께 채워나갈 것들을 기대하며 잠을 청한다. 지금 이 순간에 잠 못 들고 있을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다. 나도 해냈다. 그러므로 당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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