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JS May 03. 2021

신과 인간 그리고 사랑

<사랑이 한 일> - 이승우

성경의 이야기들은 적나라하고 솔직하며 때론 기괴하다. 시대 문화적 배경을 충분히 감안해도 그렇다. 마을을 헤매고 있던 나그네를 대접하려 했던 롯, 소문을 듣고 그의 집에 쳐들어와 그들을 내놓으라며 행패를 부리는 소돔의 사람들. 성난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 자신의 두 딸을 내주겠다는 롯의 발언은 기괴하다. 신의 가르침, 신의 사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게끔 한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버리면서까지 신을 향한 사랑과 숭배를 실천한다. 욥의 신앙을 두고 사탄과의 내기를 벌인 신은 어떤가. 그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 욥의 모든 재산을 빼앗고 심지어 가족까지 몰살시킨 신은 과연 욥이 보인 갸륵한 신앙에 기뻐했을까. 욥과 신을 제외한 그의 가족의 입장에서는 이 황당무계한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또, 그의 충실한 신자인 아브라함에게 99세의 나이에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사랑하는 아들을 안겼으면서 이제는 그것을 자신에게 바치라 명한다. 성경의 신은 자신을 믿는 자들을 시험에 들게 하고 신을 믿는 자들은 고통에 몸부림친다. 시련을 통과한 자들은 결국 구원을 받지만 그 과정에서 주변인들은 희생된다. 이 과정 속에서 진실된 신의 아가페를 느낄 수 있다고 아마 종교인들은 말한다. 신을 향한 경외, 경배, 만물의 생사를 관장하는 하느님의 뜻에 길이 있다고. 타고난 청개구리 DNA를 가진 나로서는 모르겠다. 나에겐 욥의 가족, 아브라함에게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 그리고 최초의 살인자 카인의 시선에 더 무게가 간다. 한 줌 사라져 갈 미약한 인간들에게 끊임없이 사투를 벌이게 하는 신의 의도는 다소 섬뜩하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버리는 아브라함


<침묵>의 로드리고 신부 또한 시험에 든다. 배교한 페레이라 신부를 찾고,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려 동쪽 끝 일본에 다다랐지만 그곳에는 참혹한 고문에 서민들의 삶이 파괴되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단지 그들의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신부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란 답 없는 신을 향한 일방적인 기도뿐이다. 자신이 신앙을 포기함으로써 남은 신자들을 구할 수 있음을 깨달은 신부는 결국 후미에를 밟는다. 남은 여생을 일본에서 보낸 후 수명이 다했을 때, 불길 속에서 가슴 안에 십자가를 품은 로드리고 신부는 끝까지 신을 믿었을까. 우리는 알 수 없다. 아니 신의 피조물로서는 창조주의 뜻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일까. 동료를 팔고 배교했다는 죄책감에 번뇌하는 기치치로에 마음이 가는 것은 아마 우리가 신의 사랑을 머리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은 두렵다. 신의 거룩한 사랑을 인간이 이해할 수 없어서 신은 끊임없이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일까.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이 무한해서 그 역이 성립할 수 없는 것인가. 사랑을 알지 못하는 상대에게 끊임없이 무엇을 요구하고 희생하도록 하며 고통받게 하는 방식은 나로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과학이 종교로 가리워져 있던 세상의 구름을 걷어내고 있는 현실에서도 종교는 굳건한 영역을 자리하고 있다. 그 의미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지만 신의 메시지를 설파하고 신이 그랬던 것처럼 사랑을 증명하고 요구하라고, 당신의 희생을 신께 드러내라고, 신의 입을 빌려 인간이 말한다.


사랑은 끊임없이 바라고 요구한다. 혹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바치게 한다. 사랑의 방향은 때로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하지만 그리스도가 지상에 현현해 퍼트린 사랑은 전 세계로 뻗어 나갔다. 그의 종교를 바탕으로 이룩한 문명은 인간 능력을 초월한 어떤 불가해한 힘을 증명했다. 하지만 그가 행하고자 가르치고자 했던 사랑은 오용되거나 남용되고 있다. 신의 장엄한 뜻을 알 수 없기에 인간은 그것을 오역한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시험하고 요구하고 바친다. 혹은 자신이 신이라 참칭 하며 사랑을 바치라 명령한다. 사랑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것을 무기로 타인을 지배하려 든다. 나그네를 내놓으라며 롯의 집에 들이닥친 소돔의 사람들처럼. 그들에게 두 딸을 내어주겠다는 롯 처럼. 자식을 갈라 불태워 하느님에게 바치려고 한 아브라함처럼.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은 두렵다. 자식이 잘되기를 원한다며 정작 자식이 뭘 좋아하는지 조차 모르는 부모,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상대를 끊임없이 스토킹해 공포에 질리게 하는 사람. 권력과 지위를 업고 자신의 행위가 사랑이라 착각하는 범죄자들은 오늘도 신을 기만하고 사랑을 오역하고 있다. 모든 것은 사랑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이삭은 말한다. 부모의 사랑으로부터 태어난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고통받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한다. 주어진 생이 다할 때까지.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다. 현실의 신은 성경에서처럼 사다리를 내려주지 않는다. 희로애락에 휩싸인 세상에 침묵의 시선만 있을 뿐이다. 누군가에게 아름답고 성스럽게 들릴 모든 것은 사랑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말이 나에겐 그렇게 않다. 이 문장은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깔린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