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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S May 29. 2021

계속 읽을 수 밖에 없다

<아직 멀었다는 말> - 권여선

소설 속 인물들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벗어날 길 없는 비참한 상황에서 겨우 한숨 쉬어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허구의 이야기라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지 않는다면 건너 아는 사람의 사연을 듣는 것처럼, 차 안의 지루한 시간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의 사연처럼 느껴진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주어진 생이 버겁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들숨과 날숨만으로도 가슴을 누군가 쥐어 짜는 듯이 주변 환경은 생을 옥죄어온다. <손톱>의 소희는 제 살길을 찾기 위해 도망친 엄마와 언니를 기다린다. 빚까지 떠안은 소희가 겪는 부조리는 비극이다. 시작부터 잘못 꿰어진 단추처럼 소희의 생은 나아질 기미가 없다. 백칠십만 원 월급에서 빠져나가야 할 공과금과 생활비를 머릿속으로 계산해야 하고 육천 원짜리 짬뽕 한 그릇에 수천번 흔들려야 하는 그녀의 삶은 청양고추처럼 맵다. 그녀의 삶을 눈으로 좇으며 느끼는 무력감은 안온한 환경에서 독서라는 취미를 즐기는 나에게 이상한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보통 무거운 이야기와 영화는 대중적이지 않다. 주중에 자신의 시간을 바쳐 먹고살기 위한 돈을 벌어야 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겐 삶 자체가 무겁기 때문이다. 족쇄로부터 해방된 시간은 오롯이 자신을 위해, 따뜻하고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만 보고 싶어 하니까. 


자신을 위협하는 적을 발견했을 때 타조는 모래 속에 자신의 얼굴을 처박는다. 자신이 보지 못하면 포식자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다. 타조가 머리를 숨기고 있는 순간에도 포식자는 존재한다. 포식자는 다만 선택할 뿐이다. 타조를 그냥 지나쳐 갈 것인가. 잡아먹을 것인가. 나는 분명히 존재하는 불행이라는 거대한 공포에 몸을 숨기기보다 그것을 똑바로 쳐다보는 쪽을 선택했다. 이것은 당위의 문제가 아닌 선택일 뿐이다. 굳이 열어보지 말라고 하는 상자를 열어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향을 가진 나로서는 소설을 끼고 살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권여선의 소설을.


가장 가까운 이들로부터 느끼게 되는 부당함, 이것으로부터 기인되는 비극은 특별하다. 상처는 더 깊고 넓게 패이며 흉터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평생을 지고 살아가는 문신이 된다. 소설 속 인물들은 대부분 가족으로부터 얻은 상처를 품고 있다. 엄마가 도망친 와중에 아빠가 다른 언니가 자신을 버릴 것이라 어렴풋이 의심하면서도 그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소희의 마음은 슬픔이라는 감정이 채 말라버렸다는 말이 떠오르게 한다.

비정규직의 딜레마에 빠진 <너머>의 N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언제 생을 마감할지 모르는 하루가 다르게 약해져 가는 노모를 둔 기간제 교사 N은 자신을 두 달간 쓰고 버릴 도구로 전락시킨 교장에게 분노를 느끼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없다. 알뜰하게 병가를 채우고 방학 직전에 돌아오기로 한 정교사, 그저 빈자리를 채울 누군가만 있으면 되는 교장, 자조를 자주 해서 저주가 된 것일까. N 이 화살을 돌릴 곳은 없다. 목표를 찾지 못한 시위는 자신을 향하게 되고 삼키고 삼킨 화는 내면에 욕창을 남긴다. 

소시민들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입게 되는 사회구조와 무지로부터 수렴하는 무력감은 <친구>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거대한 몸을 이끌며 투잡을 뛰는 해옥. 홀로 민수를 키우며 사는 그녀에게 신의 존재란 감사다. 사소한 것들에 대한 감사를 느끼는 해옥은 민수가 학교에서 집단 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담임 역시 자신의 무력감을 느껴서일까, 그저 굽신거리는 해옥을 향한 매서운 다그침은 해옥을 더욱 쪼그라들게 만든다. 약자가 약자에게 발산하는 분노만큼 부조리한 경우가 있을까. 생쥐처럼 구석에 쪼그라져 신께 기도드릴 수 있는 것 말고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아들 민수는 자라서 어떤 인간이 될까.

글과 말이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전갱이의 맛>은 작가의 말과 이어져 보인다. 성대 용종 수술로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뱉은 즉시 흩어지는 말들이 어쩌면 나 자신의 기억에 각인시키기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그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무엇 때문에 소설을 계속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작가의 말에 대한 질문에 스스로 답하고 있는 단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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