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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S Jun 29. 2021

돌이킬 수 없더라도

영화 <사울의 아들>

비극은 그 자체로 이야기가 된다. 그럼 비극 자체를 끌어와 영화로 만든다면 그것은 좋은 영화일까? <사울의 아들>은 이야기를 다양한 화학적 촉매로 변주하는 방식, 영화의 의미에 대해 곱씹게 한다. 비극을 주제로 한 영화들은 늘 재현의 윤리를 마주한다. 역사적 비극을 그대로 스크린에 가져다 놓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비극 자체를 스크린에 상정하는 것은 겨우 아문 흉터를 액자에 담아 전시하는 바와 다르지 않다. <사울의 아들>은 비극을 다른 방식으로 활용한다.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한 방식으로. 좁은 프레임과 불안한 핸드헬드 촬영 역시 이야기에 힘을 싣기 위한 촉매로 활용했다. 


수용소의 시체 처리반으로 일하는 사울은 생명이 꺼져가는 한 소년을 발견한다. 이윽고 소년은 숨을 거둔다. 이때 사울은 문득 생각한다. 소년의 장례를 제대로 치러줘야 한다고. 랍비를 찾아, 기도문을 읊으며, 양지바른 곳에 묻어줘야 한다고. 갑자기 생긴 목표를 위해 사울은 생사를 넘는다. 유대인이 학살되는 현장에서 왜 그는 소년의 장례에 그토록 집착했을까. 소년이 그의 친아들이라서? 집에 두고 온 친아들이 생각나서? <사울의 아들>은 관객에게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사울의 행위에 대한 질문이다. 이전까지 나치의 명령대로 기계처럼 시체 처리를 했던 그가 왜 소년의 장례를 치러주는 것에 갑자기 자신의 목숨을 거는 것일까.

악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그 공간에서 사울은 소년, 즉 아들에 의해 이전의 자신을 떠올린다. 수용소에 들어오기 전의 자신, 지옥의 노예가 아닌 평범한 헝가리 시민이었던 자신을. 사실 아들의 장례를 치르는 것에 왜 그토록 몰두했는가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관객은 알 수 없다. 다만 마지막 혼란 속 수용소를 탈출해 잠시 쉬고 있던 오두막에서 마주한 또 다른 소년. 그를 보며 미소 지은 사울을 통해 추측할 뿐이다.


환경은 인간을 지배한다. 미쳐버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이미 인간이길 포기한 이들에게 악은 이미 싹을 틔워 열매를 맺은 상태이다. 열화 된 인간의 마음은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없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사울은 미치도록 돌아가고 싶었던 게 아닐까. 영화의 메시지는 아우슈비츠에 한정되지 않는다. 수많은 갈등이 조장되고 그것이 적절하게 이용되고 있는 현재에 더 공포스럽게 다가온다. 1944년의 제노사이드는 특정 인물에 의해 수행되지 않았다. 히틀러라는 나치의 상징적 존재가 있었지만 실제 살인은 그의, 혹은 그들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한 이들에 의해, 존더코만도라 불린 또 다른 유태인들에 의해, 유럽의 화약고가 터지기 전 각자 가정에서 평범하게 살던 이들에 의해 벌어졌다. 세계사에서 벌어졌던 집단학살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누군가는 명령하고 누군가는 수행하고 누군가는 희생당했다. 평범한 이들이 평범한 이들을 살해했다. 격랑을 거스르려 했던 영화 속 사울은 실패했다. 수용소를 탈출한 후에 나치군에게 쫓기는 급박한 상황에서 조차 장례를 치르려는 시도를 했지만 강물에서 시체를 놓쳤다. 허망한 그 앞에 나타난 금발의 소년,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인 사울의 미소. 시도했지만 실패한 사울의 행위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어떤 길을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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