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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S Sep 02. 2021

홍콩의 흑과 백

<13.67> - 찬호께이

요새 책을 읽고 통 글을 쓰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책을 읽지만 예전처럼 책과 관련된 글을 쓰는 게 조금 버거워졌다. 흥미를 잃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다시금 읽고 쓰는 강렬한 동기를 얻기 위해 집어 든 책은 윌리엄 포크너 단편집과 금각사였다. 결과는 최악이었다. 읽다 지쳐서 중간에 책을 덮어버렸다. 지적 허영만으로 이 책들을 읽어 나가기엔 숨이 턱까지 차는, 마치 높은 언덕을 자전거 1단으로 오르는 느낌이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이야기’로서의 재미다. 활자를 읽는 순간 머릿속에서 터져 나오는 상상의 향연. 그래서 추리소설을 집었다. 추리소설은 사실 내 고향과 같다. 디데이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군대에서 활자에 익숙해지도록 도와줬다. 문장들을 읽는 즉시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영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책을 읽는 재미를 깨우치게 해 줬다. 일본의 히가시노 게이고를 시작으로 수많은 추리 소설을 읽었다. 범죄와 트릭에 집중하는 소설부터 범죄로부터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조망하는 소설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다. 몇 시간이고 집에 눌러있으면서 책을 붙잡고 있는 능력은 이때 투자한 시간 덕이다.


하지만 이 책 <13.67>은 선뜻 펼치기가 어려웠다. 읽기까지 제목의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었고,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중국식이라는 것, 작가의 이름이 다소 신기하게 느껴져서 여러 가지 복합적인 내 편견에 의한 일방적인 거부였다. 이동진의 빨간 책방이 아니었다면 아마 죽을 때까지 펼치지 않았을지도. 팟캐스트 1화를 듣고 바로 결제해서 단숨에 읽었다. 700페이지가량의 6개 단편 연작 소설은 1967년부터 2013년까지의 홍콩 역사를 관전둬라는 명탐정의 이야기에 굉장히 맛깔나게 녹여냈다. 천재 경찰 관전둬의 시작과 죽음을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은 다른 소설과 차별화되는 강점이다. 홍콩 경찰에서 전설로 불리운 관전둬는 병에 걸려 의식만 살아있는 상태로 처음 등장한다. 과거 그의 행적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여섯 개의 단편은 홍콩의 굵직한 역사적 사건과 그의 활약이 맞물린다. 그리고 충분히 독립적인 완결성이 있는 각 장마다 작은 반전, 그리고 책 전체를 아우르는 마지막 반전은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씁쓸한 여운이 남도록 만들어준다.


추리 소설의 주인공은 천재 명탐정이지만, 그와 더불어 시너지를 내는 재미의 큰 요소는 대척점에 있는 범인이다.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원인 또한 이야기의 끝에서 여운을 더욱 깊게 만들어주는 장치인데, <13.67> 내의 사건들에서 일어나는 범죄들은 단순한 악인이 저지르는 사건이 아니다. 관전둬에 필적할 정도로 머리가 비상한, 철두철미한 계획을 세워 다른 이를 장기짝처럼 사용하는 방식으로 범죄를 디자인하고 실행하는 두뇌형 빌런들이다. 예로 김전일에게는 요이치가, 셜록에겐 모리아티가, 코난에겐 검은 조직이 있는 것처럼,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범인의 심리를 장악하고 조작해 범죄를 저지르게 만든다. 이와 관련해 가장 기억에 남는 다른 작품이 있다. 바로 김전일 시리즈의 <러시아 인형 살인사건>이다. 이 에피소드 역시 살인을 저지른 범인을 완벽하게 조종한 배후의 인물이 따로 있었던 것으로 충격적인 결말을 맞는다. 범인은 자신이 조종당한다는 사실 조차 모른 채 배후의 진짜 범인에게 이용당한 후 버려진다. 단순한 과거의 복수극이 아닌 인간 내면의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방식의 이야기는 어린 시절 굉장히 무섭고 깊게 각인되었다.


이 소설 속의 관전둬는 각 장에 등장하는 ‘진짜 범인’들의 계획을 완벽히 간파함으로써 주인공의 능력을 과시한다. 동시에 경찰과 범인이라는 단순한 신분을 넘어 각 장의 진짜 흑막들과의 두뇌 싸움은 읽는 독자들을 정신없이 빠져들게 한다. 오직 추리만으로 범인을 잡아넣을 수 없기 때문에 관전둬는 증거를 조작하거나, 블러핑으로 범인을 궁지로 몰아세운다. 외통수를 걸어 스스로 자백하지 않을 수 없게 하거나, 자백과도 같은 행동을 유발함으로써 자신만의 정의를 실현한다. 관전둬는 홍콩 시민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절대명령에 의해 행동한다.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이용한다. 절대선처럼 여겨지는 관전둬의 모습을 역순으로 따라가다 밝혀지는 마지막 6장의 반전, 운명적으로 다시 얽히게 되는 1장의 두 남자의 모습은 다소 충격적이면서 안타깝다. 보통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아주 적은 단서들의 조합으로 완벽한 추리를 만들어내는 주인공, 범인을 앞에 두고 쏟아내는 마지막 일장 연설은 어릴 적 익히 봐온 명탐정들의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마치 테미스의 현신 같아 보이는 관전둬가 쏟아내는 마지막 추리를 보고 있으면 시원한 쾌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독립적으로 보이는 여러 개의 사건들이 하나의 목적을 가진 의도된 범인의 계략이었음을 밝혀내는 방식은 작가가 얼마나 정교하게 사건과 플롯을 구성했는지 느껴진다. 독자들은 줄곧 작가가 뿌려놓은 떡밥에 허둥대다 가장 극적인 타이밍에 완성되는 퍼즐에 카타르시스를 맛본다.


이 소설이 오락적인 요소에만 치중했다면 이 정도 장황한 글을 쓰지 않았다. 깊은 여운을 남기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관전둬의 행적이 곧 홍콩의 현대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과거 짧은 전성기를 지나 전쟁 직후의 혼란스러운 상황은 현재의 어지러운 홍콩의 상황을 마치 거울처럼 비추고 있다. 어쩌면 완전 무결해보이는 천재의 유지를 이어받는 후계자 뤄샤오밍과의 연결고리는 마치 과거 1980년대 아시아의 별이었던 홍콩 문화에 대한 향수, 그 시절의 화양연화를 언젠가 다시 볼 수 있기를 기원하는 작가의 작은 바람 같이 느껴진다. 내 경우엔 홍콩의 역사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흥미롭게 읽혔다.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이 홍콩섬 일부를 양도받은 것을 시작으로 신계 지구까지 영토를 확장한다. 중국 국공내전으로 공산당을 피해 이전해온 사람들로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홍콩은 영국과 중국이 혼합된 특수한 환경과 문화를 피워나간다. 중국 문화 대혁명으로부터 시작된 불씨가 홍콩에 까지 번지게 되면서 공산당의 과격한 쟁의로 인한 67년의 폭동,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부패한 경찰 조직, 그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70년대 염정공서의 설립, 그리고 홍콩이 중국의 투자를 위한 허브로 기능하게 되면서 외국 자본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홍콩은 아시아의 강자로 부상한다. 축적된 부로부터 펼쳐지는 독특한 문화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홍콩 영화의 시대를 열었다. 영화로만 봤던 홍콩 경찰의 로망, 왕립 홍콩 경찰에 대한 특수한 문화도 이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홍콩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84년 중국은 영국으로부터 97년에 홍콩 완전 반환을 동의하는 조약을 얻어내면서 홍콩에는 다시금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본토의 정치적 영향력은 밝게 빛나던 홍콩의 색을 점차 퇴색시킨다. 우산 혁명과 최근 범죄자 인도법을 시작으로 대규모 홍콩 시위는 홍콩이 완전히 중국에 편입되기 전 타오르는 마지막 불꽃처럼 보여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2047년에 홍콩은 중국에 완전 편입된다. 현재의 우리 세대가 알던 홍콩은 그때 남아 있을까? 그때가 되면 이 소설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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