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업, 글, 그리고 비즈니스의 단 하나의 이유 : "지금, 여기,
Sound Essay No.50
우리는 스마트폰 하나로 전 세계 모든 음악을 언제든 들을 수 있습니다. 버튼만 누르면 런던 필하모닉의 연주가, 비틀스의 목소리가 깨끗한 음질로 재생됩니다. 기술적으로는 완벽합니다. 하지만 가끔 이런 허전함을 느끼지 않나요? 이어폰으로 듣는 음악이 어딘가 가볍고, 휘발성 강한 데이터 조각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20세기 초,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이미 이 현상을 예견했습니다. 그는 저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아우라(Aura)'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아우라란 원본 예술 작업이 가진 '지금, 여기(Hic et Nunc)'에만 존재하는 일회적이고 독보적인 현존성을 의미합니다. 그 작품이 있는 장소, 그 시간, 그 공기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신비로운 분위기죠.
벤야민은 기술 복제 예술이 등장하면서 이 아우라가 붕괴되었다고 진단했습니다. 복제된 예술은 언제 어디서나 감상할 수 있지만, 그 '유일무이함'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025년 현재, 디지털 스트리밍은 소리의 아우라를 완벽하게 제거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음악을 '만나러' 가지 않습니다. 음악이 데이터가 되어 우리에게 '전송'될 뿐입니다.
제가 2007년 무렵부터 ‘실시간 인터랙티브 사운드(Real-time Interactive Sound)'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도 이 지점에 있었습니다. 녹음 기술은 훌륭하지만, 한번 고정되면 영원히 똑같이 재생되는 소리보다는, 상황에 따라 변하는 소리가 훨씬 더 생명력 있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단방향적인 소리의 전달이 아닌 양방향적인 소리, 그리고 선형적이 아닌 비선향적인 소리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인터랙티브 사운드, 인터랙티브 음악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인터랙티브 사운드는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관객의 움직임, 공간의 모양, 혹은 사용자의 터치나 행위에 따라 매 순간 소리가 다르게 생성됩니다.
지금(Now) : 이 소리는 당신이 반응하는 바로 이 순간에만 존재합니다.
여기(Here) : 이 소리는 당신이 서 있는 바로 이 공간의 상황과 결합하여 탄생합니다.
즉, 인터랙티브 사운드는 복제 불가능한 '단 한 번의 소리'를 만들어냅니다. 저는 이 기술을 통해, 디지털 시대에 실종되었던 '지금, 여기'의 현장성, 즉 아우라를 다시 소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습니다.(링크 : Live Performance for Video Tracking with Max/MSP & Jitter)
여기에 더불어, 단순히 ‘개인의 감각’을 넘어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말년의 사유를 통해 도달했던 '주체의 형성'을 통해 확장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푸코는 우리가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매 순간의 실천을 통해 스스로를 예술 작품처럼 빚어내는 능동적인 주체라고 보았습니다.
인터랙티브 사운드의 세계에서 관객은 수동적인 청취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움직임으로 소리를 창조하는 '주체'입니다. 그리고 이 경험은 필연적으로 확장됩니다.
내가 공간에서 움직여 소리를 만들어낼 때, 내 옆에 있는 타인 또한 자신의 움직임으로 소리를 만들어냅니다. 나의 소리와 타인의 소리가 실시간으로 섞이고 반응하며, 혼자서는 만들지 못하는 ‘화음’을 만들어냅니다. 푸코가 '자기 배려(Care of the Self)'가 결국 타인과의 올바른 관계 맺기로 이어진다고 했듯, '나의 소리'를 찾는 행위는 곧 '우리의 소리'를 듣는 행위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 행위들은 네트워크로 끊임없이 확장될 예정입니다.
이 순간, 우리는 각자 고립된 이어폰을 낀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연결된 존재'임을 감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제안하는 슬로건, "지금, 여기, 우리(Now, Here and Us)"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예술가로서의 나 : 작업을 통해 관객들을 연결합니다. 사람들은 하나의 인터랙티브 작업 앞에서 함께 몸을 움직이고 행동하며, 그들 스스로의 경함을 통해 작업의 일부가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순간의 화음을 통해 서로는 공명하며 개개인의 존재를 확인합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공동체의 아우라'입니다.
사업가로서의 나: 클라이언트의 공간을 '만남의 장'으로 변모시킵니다. 단순히 BGM을 트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 머무는 사람들의 밀도와 에너지, 그리고 주변 환경을 '그곳'만의' 소리로 변환합니다. 고객들은 무의식 중에 "우리가 지금 이 공간을 함께 채우고 있다"는 유대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제가 비즈니스를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연결의 가치'입니다.
벤야민의 우려와 달리, 기술은 아우라를 파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제 아우라를 '재창조'하고 '확장'하는 단계로 진입했습니다.
저는 앞으로의 사운드 시장이 '재생(Play)'의 시대에서 '생성(Generate)'과 '반응(React)'의 시대로 완전히 넘어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고정된 음원을 각자 듣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움직임과 환경에 반응하여 '우리'만을 위해 실시간으로 연주되는 음악. 게임 속 세상이, 도시의 광장이, 우리의 거실이 우리와 함께 호흡하는 소리.
저는 소리를 통해 잃어버린 '지금, 여기'의 감각을 회복하고, 파편화된 개인들을 '우리'라는 이름으로 다시 연결하는 '공명(Resonance)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역설적으로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뜨겁게 연결된 순간을 그리워하게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