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버기버기 May 25. 2019

친구 관계에서의 정치

관계에서의 손절과 편가르기


 최근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친구라고 부르는 집단에서도 편가르기와 정치질이라고 불리는 행동을 통해서 공감대 무리를 형성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각자의 도덕적 규범과 통찰을 가지지 않고 사는 사람들을 가까운 사람으로 두는 것이 득이 되는 행동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친구 A는 B,C,D와 친했다. 친구 B는 사회 윤리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도 A에게 잘못된 행동을 하였다. C와 D는 B를 비난했고 A를 위로해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B, C, D는 다시 같이 다니기 시작했고 오히려 A는 소외되었다. 친구 C는 ‘지난 얘기니까 네가 참아, B가 사과한다니까 내가 자리를 만들어볼게’라며 공감이 없는 중재를 하려 했고 D는 방관했다. A는 C와 D에게 섭섭했고 혼자가 되었다.


B는 편가르기, 자기합리화, 동정 사기 등의 정치질이라고 불리는 행동을 통해서 C, D를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친구 C와 D는 진정으로 A에게 공감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중립이라는 말로 포장하며 A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식으로 A에게 더 큰 상처를 주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일상을 생활을 살아가며 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그것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나 생각이 많다. 


개인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공공연하게 퍼져있는 지금 사회에서도 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실제로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본질적 이유는 상대방이 내 마음 같지 않은 것에 대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다들 머리로는 타인이 나와 다른 생각은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이다.


우리는 다들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자기 나름대로 타인을 대할 때 프로세스를 정해두곤 한다. 방어기제 역시 이 프로세스에 속하는 범주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경험을 통해서 이 프로세스를 보안해가는 작업을 반복하는 것을 성숙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에게 나의 상태를 공감 받기를 원하지만 당연하게도 타인이 느끼는 감정은 내가 느끼는 감정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개인주의가 트랜드화 되기까지 하고 있는 지금의 사회에서는 그 갭이 더 크게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감 받기를 포기하라는 회의적인 마인드를 가지라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타인의 공감을 타의적이고 수동적으로 받아들기만 해서는 소외되기 십상이며 타인의 공감은  ‘정치질’과 ‘편가르기’를 통해서 쉽게 얻을 수 도 있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소신 없이 남들의 정치질에 휩쓸려 다닌다. 이는 정계나 미디어에서 많이들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사람 관계에 있어서도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휩쓸려 다니는 사람들을 내 곁에 머물게 하는 것은 각자가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나는 편가르기를 하는 사람보다 거기에 휩쓸리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싶다. 나는 앞선 글에서도 주체적인 생각이 결여된 사람은 위험하다고 반복해서 서술했고 이는 독일의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했으며 후에 아이히만 실험 등을 통해 그 위험성이 증명되었다. 


이런 것들은 친구라는 작은 조직의 범주에서 얘기되었지만 회사나 국가 차원의 조직구조에서도 생각해볼 수도 있다. 기업에서는 이미 ‘사내 정치’라는 말이 일반화되었고 ‘임원급으로 올라가려면 일을 잘하는 것보다 정치를 잘해야 한다’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어쩌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편가르기와 정치질은 능력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는 친구라는 관계에서도 이런 것들이 필요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친구일까?


나는 친구 관계에서 이런 것들을 하기 싫어서 ‘안 주고 안 받기’나 더치페이를 하게 만들었다. 마치 제도를 통해 정치인들을 견제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는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오래 사귀었다고 좋은 친구는 아니다. 몇 시간 전에 만나도 마음을 나눌 수 있고 좋은 친구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정치질을 하는 친구든 정치질에 휩쓸리는 친구든 그것들을 감안해서까지 유지하고 싶은 관계라면 그렇게 해도 좋다. 관계 역시 답이 없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 사이에서 ‘손절’이라는 단어가 쉽게 쓰이는 지금 사회에서 진정 손절해야 하는 사람이 누군지 보는 통찰은 필요할 것이며 스트레스받는 관계를 굳이 의리라는 불분명한 가치 때문에 유지해가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처럼 보인다. 다시 한번 주위 사람들을 통찰력 있게 바라보고 관계의 스트레스가 주는 에너지를 다른 분야에 쓰기를 추천한다.



출처: http://www.tuxonice.net/fun-friendship-project-ideas-for-the-last-day-of-school.html



관련글 >>  주체적사고와 동사로서의 철학




작가의 이전글 성공의 첫걸음은 근자감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