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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기버기 Nov 05. 2019

의존적 사랑을 넘어서

스피노자가 사랑하는 법


스피노자는 우리가 사는 우주와 모든 생명체, 사물, 물리력, 시간 개념까지 모든 것에 신이 깃들여있다고 생각하는 범신론을 주장했다. 그러므로 개개인 역시 신의 일부이다. 그렇다면 타자의 자유를 침범하고 계몽하려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그에게 인간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새에게 날개가 있고 호랑이에게 이빨이 있듯 인간은 자기의 욕구를 인지해서 욕망으로 볼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운 좋은 동물에 불과하다. 그는 자유로운 상태가 신즉자연에 가까운 상태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자유는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자유와 조금 차이가 있다. '자기원인'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가장 자유로운 상태이며 그런 존재는 신이 유일하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은 완전한 자유에 가까운 존재가 되면 삶이 더 행복하다고 말한다. 인간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며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 의무도 없다. 다만 개개인의 행복과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랑도 행복하기 위함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의존적 사랑, 독립적 사랑

사람들은 사랑을 하면 그 대상에게 의존적이게 된다. 그것이 연인이든 부모든 친구이든 마찬가지다. 하지만 의존적인 사랑은 우리의 시야를 편협하게 만든다. 획득하고 나면 금방 사라지기도 하고 불안정하다. 또 사랑하는 대상의 태도나 행동에 따라 감정이 요동치고 사랑이 아주 간단히 분노로 변하기도 한다. 질투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내가 가수라고 생각해보자. 마음에 드는 대상을 나의 공연에 초대했다. 나는 그 대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관객석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 그 사람만 보이고 다른 관객들은 아웃포커싱 되어 보인다. 하지만 노래가 시작되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표정이 어둡다. 그렇다면 나는 감정이 요동쳐서 내가 해야 할 본분인 노래가 제대로 되지도 않고 마음이 복잡해진다. 어쩌면 그 대상은 내 노래가 싫어서 표정이 어두워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사 혹은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그랬던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보이는 것만 믿고 신경이 쓰인다. 시야를 조금 넓혀서 다른 관객들의 표정을 보니 다들 환호하고 있고 나의 노래를 좋아해 준다. 그렇다면 나는 감정의 요동도 사그라들고 보다 기쁜 마음으로 노래에 집중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보다 자유로운 상태로 나아간 상태이다. 나의 과업이자 실존의 이유인 노래를 삶에 적용해본다면 행복 추구이다. 한 사람에게 의존적이고 집중된 상태에서는 내가 행복을 추구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 다른 예로 어린아이의 사랑이다. 영유아기 때는 어머니에게 전적으로 의존적인 사랑을 한다. 그래서 어머니가 자리를 비우면 고립감을 느끼고 자신이 버려졌다고 느끼며, 심하면 아동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커가면서 아버지나 다른 양육자의 존재를 인식하고 점점 독립적으로 변해간다. 자기 스스로 세계를 관찰하는 것을 배우며 어머니에게 집중된 시야를 점차 넓혀간다. 그럼 더 이상 어머니의 사소한 행동에 상처를 받지 않게 된다. 커가면서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빠져드는 것이 아니고 참여하는 것이다. 주위를 보면 "나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좋아"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이것은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사랑을 하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다르지 않고 유아적인 사랑이다. 에리히 프롬은 자신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약 10살 이전의 어린이들은 사랑받는 것에 대해서만 즐겁고 기쁘게 반응하며 아직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한다. 즉, 프롬은 유아적인 사랑은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라는 원칙에 따른다. 그러나 성숙한 사랑은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라는 원칙에 따른다. 미성숙한 사랑은 '나는 네가 필요하기 때문에 너를 사랑한다'라고 하지만, 성숙한 사랑은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필요하다'라고 술회했다.


삶의 목적은 행복 추구에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사랑하는 것 또한 행복을 추구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앞서 인간은 욕구를 욕망으로서 인지하는 능력이 있는 생물이라고 언급했다. 그저 고립감을 극복하기 위한 목적은 욕구에 가깝다. 욕구가 목적이 된다면 미성숙하고 끌려다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마치 '사랑의 노예'처럼 말이다. 이것을 욕망으로 승화시키려면 보다 이지적이고 독립적인 자신이 필요하다. 만약 스피노자가 살아있다면 어떤 사람을 사랑하려고 했을까? 아마 주체적이고 자신의 욕망이 뭔지 정확히 알고, 우선순위를 매긴다면 상대보다 자신이 높은 위치에 있는 그런 사람을 사랑할 것 같다. 그럼에도 타인의 욕망을 긍정하기 때문에 구속하고 싶기도 하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대상을 이해하려 노력할 것이다. 자유로운 인간이 된다는 것은 정도의 개념이다. 자유로운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자유롭냐 아니냐는 정도의 차이이다.


완벽한 사랑은 없다. 행복한 사랑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행복한 연애가 되기 위해 서로의 다름을 맞춰가는 과정이 사랑이 아닐까? 그리고 그 과정이 즐거운 사람이면 더욱 좋을 것이다. 과정이 즐겁기 위해서는 각자가 원하는 삶의 태도를 명확히 표현할 줄 알아야 하고 상대의 태도를 존중해줄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양 있고 독선적이지 않는 사람이 서로에게 성숙하고 행복한 사랑을 만들어감에 있어 유리한 것은 맞다. 하지만 사람은 바뀌고 발전해가는 존재이므로 염세적이고 명확한 이상형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관람석의 한 사람이 아닌 여러 관객을 보는 시야를 갖는 것처럼 세상 모두를 사랑하라. 그러면 당신의 사랑은 더욱 행복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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