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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인간 Jan 25. 2021

행운에 대한 생각

나심 탈레브 <행운에 속지 마라>를 읽고

나심 탈레브의 원작 <행운에 속지 마라>의 원저의 이름은 행운에 속는 멍청이가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저자 나심은 미국 월스트리트의 옵션 트레이더다. 온갖 숫자와 수치를 가지고 통계적으로 접근해 이익을 내는 전문가 집단의 일원이다. 그런 그가 자신은 전문가가 아니라고 말한다. 모든 주식투자에 행하는 행동들은 순전히 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실력을 통해 돈을 버는 직업은 '치과의사'일뿐이라고 말한다. 


불확실성은 행운이자 유연함 


저자의 책을 읽고 난 후 가장 와 닿은 부분은 바로 <샤워하면서 떠오른 세 가지 생각>이다. 여기서 저자가 생각하는 운에 대한 부분이 집결되어있다. 운의 다른 말은 불확실성이다. 불확실성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물론 인간은 예측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불안해한다. 불안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가장 큰 깨달음을 얻었던 부분은 매시간 주어진 시간에 얽매여 살수록 행복하지 않는다는 것. 결국 절대 잡을 수 없는 허상에 대해 집착할수록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불확실성은 물론 불안한 것이지만 뜻밖의 행운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 예측하지 못한 사실을 받아들일 때 때로는 즐거울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가령, 열차가 도착하는 시간을 신경 쓰며 시간을 내다 버리기보다는 다음 차를 기다릴 수 있는 여유로움 따위 같은 것들이다. 예상치도 못한 누구에게 선물을 받는다거나, 갑자기 비 갠 하늘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 그렇게 삶을 유연하게 살아가며 불확실성에 대해 열린 자세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가짐 말이다.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행운에 대해 집착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운을 말할 때 절대 예측하지 않고 그 방향에 대해 모른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기여와 보상은 반비례한다는 인생의 법칙. 그렇다. 직장인으로 뼈 빠지게 노력하고 일을 열심히 해도 결과가 좋지 못할 수 있다. 노력이 곧 성공을 좌우하지 않으며 노력의 절대적 시간이 실력을 만들어주진 않는다. 그렇기에 더 유연하게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 마음 깊이 간직한 것, 개인적인 것,, 이야기 들은 것, 실체가 있는 것을 좋아하고 추상적인 것은 경멸한다. 우리에게 좋은 것(미적 감각, 윤리)과 나쁜 것(운에 속는 어리석음)의 차이는 모두 여기서 나오는 듯하다.



성공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불확실성의 가장 큰 매력이자 성질은 바로 일시성일 수도 있겠다. 지금까지 10년간 성공했다고 1년 안에 망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영원한 성공은 없으며 반대로 영원한 패배도 없기에 항상 잘 나갈 때 운에 속는 어리석음을 맹신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운으로 만들어진 결과는 결국 운일 뿐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 자체에서 겸손함과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없앨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속 가능한 사실에 대해 맹신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행운이 개입될 여지를 줄이는 것도 중요하다. 행운에 대해 비중을 높이기보다는 본인의 실력을 높여서 그 행운이 다가옴에 대해 보너스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 '성공 = 운 * 실력' 방정식. 이것은 저자도 의심하지 않는 진리기도 하다. 



생존 편향을 무시하는 것은 전문가들도 상습적으로 저지르는 실수다.

모든 편차에 평균 회귀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경우에 발생한다.

인생은 비선형 



신호와 소음 


신호와 소음은 다르다. 그러나 감정의 영역에서 신호와 소음을 분간하기란 쉽지 않다. '마치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돈을 모으고 실패하지 않는 투자를 하면 언젠가는 부자가 된다'처럼 아주 당연한 사실이지만 방법적인 알맹이가 전혀 없는 말들과 같다. 그것이 소음 일지 신호일지는 판단하는 사람의 몫일뿐이다. 사후 결과를 두고 해석하는 방법의 차이일 뿐, 지난 사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은 정말 쉽지만 그것을 사전에 예측 하기란 정말 어려운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상관관계>에 의지할수록 별 대수롭지 않은 미신만 생긴다. 내가 빨간 넥타이를 매서 면접에 통과했다고 그다음 면접에 빨간 넥타이를 찬다고 면접에 붙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운에 영향은 단순히 사물의 변화나 상황의 동일성에 따라 영향을 받는 단순한 것들이 아니다. 물론 그런 일련의 동일성과 반복적인 행위가 심리적 위안을 가져올 수 있겠지만 결과를 다르게 바꿀 순 없다. 


인간은 옳고 그름에 대해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들이 그 분별한 대로 행동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가령, 폐암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들이 쉬는 시간에 담배를 피우는 모순된 행위가 나오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감정과 두뇌는 따로 논다. 그러나 이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결코 행동할 수 없다.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 자체는 동물의 본능이다. 인간도 역시 동물의 일종에 불과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이성적인 인간은 결국 동경의 대상일 뿐이다. 세계적인 철학자 조차도 이성적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다.



투자활동은 시장 예측보다, 허용할 수 있는 오차 범위에 훨씬 크게 좌우된다.

수학은 계산 도구가 아니라, 명상 도구다. 



최적화의 허구 


인간의 동물적 본성에 따라 사건의 패턴을 숙지하고 이를 내재화한다. 그리고 동일 혹은 유사 사건이 발생할 시에 이 패턴의 기억을 회생하여 대응한다. 이를 우리는 '최적화'라고 말한다. 그러나 최적화가 정말 최적화일까? 최적화란 효율성을 극대화한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반복적인 어떠한 행위에 대해 다시금 뇌를 움직여서 칼로리를 소모하기보다는 유사한 경험에 빗대어 패턴화 된 결과로 예측하는 행위다. 


최적화가 최적화가 아닌 이유는 바로 '불확실성'에 있다. 저자가 자주 말하는 러시안룰렛의 게임처럼, 육탄구에 총알이 1개 들어있는데 5번 모두가 총알이 없는 당김이었다면 인간은 그다음도 총알이 없다고 예상할 것이다. 바로 그동안 감정에 얽매이거나 반복 숙달된 패턴으로 그 결과를 예측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그 한 발에는 총알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 방아쇠를 당기면 그는 죽는다. 바로 블랙스완, 불확실성이 등장하는 것이다. 


최적화는 불확실성이 등장하기 전까지 시계열에 따른 반복된 각각의 사건일 뿐이다. 사건의 연속이 반복된다고 해서 모든 사건을 동일하게 보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칼 포퍼의 회의론적 사고를 통해 끝없이 의심하고 반복된 결과에 대해 다름이 존재함을 관찰해야 한다. 99번의 최적화가 1번의 최적화의 예상을 깬다면 그것은 결과 최적화가 아니다. 


책에서 등장하는 재미난 단어가 바로 <대체역사>다. 한 분야의 실적은 결과만으로 평가해서는 안되며, 역사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을 경우의 대체비용도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대체역사는 가상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의 시나리오 중에 현실에 실현된 단 한 가지의 유일한 세계일 뿐이다.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러한 수많은 세상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양자역학에서도 이는 증명된다. 모든 접합점에서 우주가 나뭇가지처럼 퍼져 나가기 때문이다. 다중 세계에서 나뭇가지의 뻗침에 따라 단 하나의 잎사귀가 열렸을 뿐이다. 


 <이 부분은 내가 참 매력적으로 느꼈던 바딤 젤란드의 트랜서핑의 비밀의 거울 이론과 매우 닮아있다. 결국 상영되는 현실세계는 그저 필름에 입혀진 여러 장면 중에 한 가지만 선택되었다는 그런 의미 말이다. 현실세계는 현실화되지 않은 다양한 가상세계의 얽힘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아마도 성찰의 힘을 빌려야 할 것이다. 다양한 철학적 논제와 세상을 바라보는 사고방식에 대해 변화, 혹은 그 사실을 해석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을 더 길러야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백조를 아무리 많이 관찰했다고 모든 백조가 희다고 추론할 수는 없다.

단 한 마리의 검은 백조가 발견되더라도 이 결론은 충분히 반증할 수 있다.

추론과 반증은 다르다. 



<우리가 시계열적인 관점에서 유한하게 살아가는 일생에 등장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 성급히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세상의 과학과 모든 사실은 이 성급한 일반화에 갇혀있다. 왜냐하면 아직 인류가 끝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유한한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직관에 반하는 진실이 있기에 현실주의는 고통스러운 것이다. 내가 믿는 것과 사실은 다를 수 있다. 기대한 것이 표출되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사실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예상한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다. 예상하지 않았더라면, 그 결과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는 체념이 더 쉬웠을 것이다. 방향을 결정하고 결과에 대해 미리 가늠한다는 것 자체가 고통일 뿐이다. 


우리가 시계열적인 관점에서 유한하게 살아가는 일생에 등장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 성급히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세상의 과학과 모든 사실은 이 성급한 일반화에 갇혀있다. 왜냐하면 아직 인류가 끝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유한한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연하고 솔직해져야 한다. 남들이 배신이라고 일컫는 찰나의 바뀜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한 가지 의견을 고수하고 지킨다고 해서 그것이 정절 혹은 신념일지라도, 그 신념이 올바른 방향이 아니라면 인정하고 방향과 경로를 수정해야 한다. 자존심이 밥 먹여주는 것이 아니다. 자존심은 내 계좌를 녹여버릴 수도 있다. 유연하게 물의 흐름처럼 대응해야 한다. 물은 온도에 따라 딱딱해진 얼음이 되기도 하고 아주 공허한 수분이 되어 공간을 구름처럼 날아다니기도 한다. 그렇다고 물의 속성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모습과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다.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당대 최고의 부자였다. 하루는 솔론이 그를 방문했다. 솔론은 존엄하고 검소하고 지혜롭고 총명하고 용기 있다고 알려진 그리스 입법 의원이다. 솔론은 크로이소스를 보고서도 엄청난 그의 부와 재물에 조금도 놀라는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크로이소스는 솔론에게 자기보다 더 행복한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고, 솔론은 전쟁에서 고귀한 죽음을 맞이한 영웅들을 열거했다. 기분이 나쁜 크로이소스는 대놓고 솔론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솔론이 대답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불행한 일을 생각해보면,, 지금 즐겁다고 해서 자만해서는 안됩니다. 또 언제든 상황이 바뀔 수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감격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 미래는 매우 다양한 형태로 불확실하게 전개될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임종하는 그 순간까지 신의 행복을 허락한 사람에게만 진정한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시간이 지나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했고 화형을 당할 참이었다. 그는 솔론의 이름을 부르며 외쳤다. '솔론 당신 말이 맞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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