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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판게아 May 07. 2024

벙어리장갑 | 1화

개똥철학 양아치

나는 철학을 경멸하고 그 가르침을 거부한다.

내 영혼이 상식에 맞게 살도록 내버려 두라.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변기에 앉아 '토머스리드'의 명언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승진. 

그래, 상식에 맞게 살도록 내버려 두는 거야. 깨달음을 얻은 듯 서둘러 뒤처리를 하고 물을 내린다.


"엄마, 내 쫌 할 게 있으니까 방해하지 마래이."     


빤스바람으로 화장실에서 나온 승진을 보자 도마 위 애호박을 썰고 있던 엄마의 장미칼이 멈춰 선다. 


"똥구멍에 똥낑기는 소리하고 자빠짓네. 백수자슥이 뭐 할 게 있는데."     

"뭐라카노 누가 백순데." 

"허구언날 술쳐묵구 노는기 백수가 아이가? 옆집 상철이는 군대 갔다 오고 효자가 됐뿟다는데 니는 해병대까지 다녀온 아가 와 그 모양이고!?" 


엄마의 잔소리는 언제나 옳다. 맞는 말이어서 듣기가 싫을 뿐. 


"알제? 엄마말은 다 옳다 근데 그거 아나. 엄마랑은 건강한 대화 자체가 불가능이데이."


당근으로 시작해 채찍으로 마무리하는 화법은 늘 통쾌하다. 

     

"알제? 내도 대가리 뻘겋고 귀에다 코뚜레 한 양아치 자슥이랑은 대화자체가 불가능이데이."


역시 그 아들에 그 엄마, 퍼'팩트' 라임으로 받아치는 엄마의 말속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애지중지 키운 아들은 어릴 때부터 남달랐고 뭘 해도 특별했다. 공부도, 싸움도, 담배도, 퇴학도, 대학도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최선을 다했다. 군대를 다녀오면 철 좀 들 거란 주변의 권유로 보낸 해병대에서 아들은 말 그대로 철만 들었다. 188cm의 큰 키에 벌크업까지 된 아들은 매력적인 괴물이 되어 사회에 나왔고 슬램덩크 강백호처럼 뻘겋게 염색한 반삭발에 한쪽 귓불에만 두터운 피어싱을 꽂은 양아치 중에 상 양아치로 진화하며 매일밤 헌팅과 유흥 속에 사는 밤벌레로 활동. 인간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란 명제를 깔끔하게 증명한 아들이 되었다.


"고마 경고했데이 방해하지 마소." 

 

승진은 목소리를 깔고 정색을 한 뒤 수건을 어깨에 걸친 채 방으로 향한다. 

못 미더운 듯 방문을 닫기 직전 한번 더 신신당부를 잊지 않는다. 


"말했어 나는! 진짜로 지금 중요해! 방해말그래이!" 


딸깍 소리가 나지 않게 문고리를 돌려 잠근 뒤 창문너머 내리쬐는 포근한 햇살을 검붉은 커튼으로 가리자 방안은 금세 음흉하고 퇴폐한 조도에 휩싸이며 눅진해진다. 테니스 공이 꽂혀있는 나무의자를 끌어당겨 컴퓨터 앞으로 바싹 다가앉은 그가 꺼두었던 모니터를 켜자...


[2006 독일 월드컵 응원녀 닮은 그녀의 아찔한 유혹. avi] 


열기로 뜨끈해진 그의 양볼 위로 모니터 빛이 퍼렇게 번들거린다. 


"그래, 이기 바로 영혼의 상식이제."


다운로드 완료라는 글자가 보채듯 깜박이자 서둘러 클릭. 책상아래 놓인 본체에서 펜 돌아가는 소리가 육중하게 높아진다. 동시에 그의 발목 아래로 내려오는 얼룩덜룩 보급용 팬티. 기다리고 기다리던 FBI WARNING 화면이 뜨자 유후- 콧잔등 위로 땀이 쏙. 적재적소에 필요한 롤휴지를 키보드 가까이 당겨놓는 것을 끝으로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이제 내 영혼은 월드컵 응원녀 닮은 아이코 에리카와 함께 날아오르는 거다. 날자, 날자꾸나! 여섯 시였던 나의 컨디션을 열두 시로 슛! 골! 


"이천수 골! 골입니다!"


쩌렁하게 외치는 해설위원의 목소리. 뭐꼬 갑자기... 재생시점을 뒤로 옮겨보지만 월드컵 응원녀 대신 가슴골을 훤히 드러내며 표효하는 이천수 선수. 뭐꼬. 상당히 혼란스럽네. 


"축구를 빤스까지 벗고 보는데. 덥나."


가까이서 느껴지는 엄마의 화장품 냄새... 아찔하다. 서서히 고개를 돌려 엄마와 눈이 마주친 승진은 본능적인 ALT + F4와 함께 괴성을 지르며 팬티를 추켜 입는다. 


"뭐꼬! 소리도 없이 들어오는데! 닌자가!"

"층간소음 시끼야. 쿵쾅대구 걸음 쓰나!"


우씨 또 맞는 말, 천슬리퍼를 신고 걷는 엄마의 무소음도 언제나 옳다. 그렇다면 도대체 방문은 어떻게 열었을까. 아차, 엄마는 잠긴 줄도 모르고 문고리를 돌렸을 거다. 호두를 한 손으로 아그작대는 전직 유도실업팀 여자부 주장이었던 그녀에게 잠긴 문고리는 중요하지 않았을 터, 그저 돌렸을 뿐이고 돌아갔을 뿐이겠지. 여러모로 나는 엄마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 도망가자. 엄마를 피해 방밖으로 튀어나가자 이번에는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던 광형이형이 입꼬리를 씰룩인다. 


"절마 삐리한 건 여전하네." 


엄마도 그렇고 광형이형도 그렇고 저들은 왜 가만있는 나를 찾아와 빈정대고 조롱한단 말인가... 


"삐리해도 어쩌겠노 가족아이가."


가족. 주거침입이나 명예훼손, 모욕 따위를 서슴없이 주고받을 수 있는 집단이니까. 

어라? 그렇담 나도 그래도 되는 거잖아. 가족이니까!


"아쒸! 뭔데? 형은 또 왜 왔는데?" 

"제대를 했음 시끼야 퍼뜩 인사부터 해야제 행님이 오게 만드나 싸가지없구로."

"그러니까 왜 왔냐고요!" 

"맞춰봐 시끼야 내가 왜 왔는지."


아니까 물어보는 거다. 영도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엄마의 오빠의 아들, 광형이형이 우리 집을 왔다는 건 놀고먹는 나를 못마땅해하던 엄마가 부른 참사이며 굳이 작업복을 입고 왔다는 건 나를 곧장 데리고 영도로 갈 심산인 거다.  


"싫다! 내 복학까지 2주밖에 안 남았거든!"


대화거부, 단절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방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임대아파트의 손바닥만 한 집에서 뻗치고 선 엄마의 덩치는 바위 그 자체. 서 있는 것만으로도 승진이 가려는 모든 곳을 막아서고 있다. 체념은 아니지만 인정도 아니기에 땅이 꺼질듯한 한숨으로 꼰티를 내며 철퍼덕 주저앉는다.  


"무라"

"됐다. 이빨 닦았다."


파닥대는 아들의 팔을 노련하게 제압한 엄마가 사과 한 조각을 그의 입에 욱여넣는다. 광형은 포크에 찔려있는 사과 한 조각을 베어 물며 벽에 걸린 2006년도 달력을 쳐다보고,  


"절마 제대한 지 얼마나 됐지요?"   

"꽤 됐다. 두 달 넘었제."

"니 복학 때까지 빈둥빈둥 놀기만 할 거가."


광형의 말에 승진의 입 한쪽이 삐쭉 올라간다. 


"뭔 소리고 뭘 빈둥빈둥 노는데! 최선을 다해가 놀 거다."


엄마의 찰진 스매싱이 승진의 팔뚝에 꽂힌다.  


"왜 때리는데! 행님은 가정폭력을 보고도 와 가만있나 신고 안 하나!"

"불효자 패는 건 합법이다."


이럴 수가! 온몸의 피가 혈관 속에서 그대로 증발하는 느낌! 이건 아니다. 인권이란 무엇인가. 

인간이기 때문에 인종, 성별 등에 상관없이 모든 이들이 누릴 수 있는 기본적 권리 아닌가. 

나는 기본권을 국가에 반납한 뒤 대한민국 해병으로써 1년 하고도 6개월간 모진 갈굼과 설움을 참아낸 자랑스러운 '예비역'이다. 그리고 그 인고의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제대하면 내 영혼이 하고 싶다는 거 다 하게 해 주자. 내 영혼이 상식에 맞게 살도록 내버려 두자였는데? 


"두 달 놀았음 됐다 2주라도 일해야제. 인나라."

"싫다."

"싫으면 시집가던가."


그래! 차라리 시집을 가자! '자유의 여신'이 머리채를 잡고 일으킨 것처럼 승진은 공중부양하듯 손도 짚지 않고 일어선뒤 현관으로 날아간다. 찰나 탁! 발목을 잡는 엄마의 손.  


"어데 어른 말씀 하시는데 엉덩이를 떼고 지랄이고?!" 

"놔라, 약속 있다." 

"아이고 개 똥 빨아먹는 소리 하고 자빠짓네! 백수가 약속은 무신!"


한 때 대한민국 유도판을 움켜쥐었던 엄마의 손이 지금은 아들의 오금을 움켜쥐고 있다. 


"알제? 엄마는 한 번 잡은 건 절대 안 놓친다." 

"아빠는 놓쳤잖아."


정말이다. 엄마는 아빠를 놓쳤다. 아니 놓아줬다. 콩밥 제대로 맥일듯한 기세로 바람 난 아빠를 미행하던 엄마는 어느 날 손에서 공기를 놓친 것처럼 툭. 놓아주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남편 따윈 없었다는 듯 구는 엄마에게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엄마처럼 한 인간과의 추억을 조용히 묻어두었다. 그 부작용일까? 가족은 영원하단 진리가 깨진 열일곱 그날 내 머릿속은 방향대신 방황을 선택했다. 


과거는 각설하고 현재의 나는 현대유도에선 금지된 가위 치기 기술로 단박에 넘어져 있다. 엄마의 아픈 상처로 농담을 한 대가치곤 너무나 끔찍한 고통. 어느새 등뒤에서 안아조르기 콤비네이션을 들어가며 숨통을 조여 오는 엄마의 힘은 여전히 대단하고, 살려달라 손을 뻗는 조카의 새빨개진 얼굴을 보며 광형은 쯧쯧 매를 버노. 흐뭇하게 바라보는데...


"새... ... 내 오... ㅅ ㅐ... 생일!"


마지막 숨을 모아 내뱉은 승진의 말에 동여 멘 쇠사슬 같던 엄마의 양팔이 스륵 풀어져 내린다. 


"뭐시?! 니 오늘 생일이가!" 


방 안의 모든 공기를 다 빨아먹을 것처럼 격정적인 들숨과 날숨을 터뜨리는 승진을 보며 광형과 엄마는 얼어붙는다. 


"맞네. 오늘이 8월 8일 8땡... 우리 아들..."

"고모도 차암, 암만 무심해도 아들 생일을 까묵습니꺼."

"우야노 내 진짜로 몰랐데이..."


졸렸던 목을 어루만지며 일어난 승진이 으어어!! 비명을 지르며 초사이언으로 부활한다. 


"내가아! 미역국을 끓이달라켔나 선물을 딜라켔나! 와 내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고!"




바니바니바니바니!! 당근당근!!


나이트클럽 룸 안, U자 테이블에 둘러앉은 승진의 친구들과 '초면'의 여자들이 바니바니를 외치며 치열한 술게임을 벌이고 있다. 그 속에서 승진도 몸에 꽉 끼는 감색 캐주얼슈트를 흔들며 바니바니를 외치고 있지만 어째 표정이 썩 유쾌해 보이진 않는다.


"근데 저 오빠는 왤케 심각함?" 

"쟤? 가끔 저런다. 원래 천재들은 생각이 많다 아이가." 

"저 오빠 천재야?"

"꼬라지는 저래도 서울대 다니거덩 서울대 알제? 졸라 똑똑하데이."


처음 본 여자에게 나의 신상을 떠드는 저 청년, 


"에이 뻥치시네!" 

"가시내 사람말을 몬믿노. 자 봐라."


내 지갑을 뒤져 학생증을 보여주는 저 스물셋 청년은.


"우와 저 오빠 지갑에 돈 억수 많다?!"

"맞제! 쟤네엄마랑 사촌행님이 생일이라꼬 돈 억수 줬다카데! 다 시키라! 오늘 내 친구가 쏜다!"


내 돈으로 생색을 내는 저 녀석이 바로 엄마가 말한 옆집 사는 내 친구 상철이다. 모두가 '최승진'을 연호하는 사이 웨이터에게 이것저것 시켜대는 '초면'의 여자를 보며 나는 엄마의 얼굴을 떠올린다. 아들의 생일을 잊었다는 죗값으로 모아둔 뭉칫돈을 쥐어주며 미안해하던 표정. 돈을 받으며 스친 엄마의 손바닥에서 전해진  '늙음'과 '고생'의 촉감...  


"알면 보인다"라는 말이 오늘처럼 와닿았던 적이 있을까... 알고 나니 보이고 보고 나니 신경 쓰인다. 

그러고 보니 엄마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네... 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고왔던 손이 코끼리 발바닥처럼 거칠어졌을까. '쎄가 빠지다'라는 말은 혀가 빠질 정도로 힘들다는 뜻이다. 나는 엄마의 쎄가 빠진 돈으로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바니바니바니바니!! 당근당근!!


웨이터 손에 이끌려 들어오는 또 다른 여자들과 바니바니를 하면서도... 

물갈이 후 또 다른 '초면'의 여자들과 더게임오브데스를 외치면서도...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야. 스테이지에서 발바닥을 비비면서도 승진의 얼굴은 오만죽상이다.


"새끼 오늘 졸라 쎈치하네. 뭔 일 있나."


샤기컷이 잘 어울리는 내 친구 상철이. 어릴 때부터 단짝인 상철이의 꿈은 배우다. 요즘은 철든 '효자' 캐릭터연기를 부모 앞에서 매일 연습한다고 한다. 덕분에 상철이 부모님은 옆집 사는 우리 엄마에게 자식자랑을 늘어놓지만 언젠가 저 녀석의 실체를 알게 되는 날, 장담컨대 호적에서 파버리실 거다. 


"에이스 나오면 승지이 니한테 꽂아달라꼬 제임스한테 팁 줬거든? 내밖에 없지!?" 

"니가 돈이 어딨 다고 팁까지 주는데."

"등록금 낸다꼬 마미한테 뜯었다! 암튼 인상 좀 펴 새끼야." 


위조한 합격증으로 부모를 기쁘게 한 내 친구. 그의 부모님은 아들이 지방대 정도는 다니는 줄 아신다. 적어도 나는 앞과 뒤가 똑같은 양아치라도 되지 저 녀석은 정말... 효자연기만큼은 일품이다. 혹은 거짓말일지언정 애교 많고 웃음 짓게 만드는 저 녀석이 진정한 효자일지도...  


"잠깐 전화 좀 하고 오께."


입장을 기다리는 청춘들로 긴 줄을 이루고 있는 클럽입구, 젊고 헐벗은 영혼들은 잠시도 가만있질 못한 채 꿈틀대고 서로를 스캔하고 증기기관처럼 담배연기를 내뿜는다. 방금까지만 해도 저 '중심'에 있던 내가 한발 떨어져 한심하게 바라보는 이유는 뭘까... 나는 왜 클럽 앞에서 개똥철학에 빠진 양아치가 되었을까. 내 머릿속의 방황은 언제쯤 끝이 날까... 심장이 쿵쾅 댈 정도로 시끄러웠던 지하를 벗어나서 그런지 지상의 적막이 더욱 낯설게 느껴진다. 


"행님... 낼부터 출근할게요."

"... ... 그래. 실컷 놀고 점심때 온나." 


통화종료 버튼을 누른 승진의 얼굴이 조금은 개운해진다. 그래, 두 달 놀았으면 됐다. 


"어데고! 빨랑 온나!"


뒤이어 걸려온 상철의 전화, 목소리 너머 들려오는 쿵쾅대는 음악소리에 마음이 곰새 설레어진다. 

그래, 오늘까지만 놀자. 생일날 노는 건 상식이니까. 다시 중심으로 가자! 


클럽 안은 아까보다 더 어둡고 더 뿌옇고 신이 나 보인다. 이제 막 클럽에 들어온 것처럼 다시 흥분되며 뜨거워진다. 의도한 듯 의도하지 않은 듯 스테이지 중앙에 도달한 그가 보여주는 섹.도.시.발 마.이.타.임. 

좌삼삼우삼삼 현란한 테크토닉에 주변으로 모여드는 몇몇 여자들, 그중 주황색 크롭티에 아이라인을 짙게 그린 브라질 월드컵 응원녀 닮은 섹시녀가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자 승진은 하트댄스로 승부를 띄운다. 흘러나오는 가사마저 오늘밤 너와 나 단둘이서 파뤼~ 파뤼~ 몸을 흔들수록 목이 마르고 목이 마를수록 쌉쌀한 술에 취하고 술에 취할수록 일상에선 하지 못한 것들이 쉬워지고 대담해지는 광란의 사이클. 


가장 높은 곳에 선 DJ는 '신'처럼 손가락을 까딱거려 이곳의 흐름을 주도하고 이끈다. 풍선 다루듯 부풀 대로 부푼 일탈의 절정에서 잔잔하고 끈적한 팝송으로 세기를 조절하는 잔기술에 몇몇 인간들은 신을 향해 엄지를 세우며 칭송해 마지않는다. 부르스타임이 시작되자 하나둘 짝을 지어 끌어안고 흔들흔들. 인간 갈대밭 속에서 승진과 섹시녀도 서로를 끌어안고 느릿느릿 유영하듯 흘러간다. 


저녁 그림자와 별들이 나타날 때

그리고 당신의 눈물을 닦아줄 누구도 없을 때

내가 당신을 백만 년 동안 붙잡아 둘게요.

당신이 내 사랑을 느낄 수 있게요. 


밥딜런의 Make you Feel My Love. 전 세계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안식을 가져다준 이 노래가 부산 서면의 나이트클럽에서도 사랑의 메시지를 퍼뜨리고 있다. 딱히 팝송에 대한 관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유독 이 노래를 안다는 건 엄마가 나를 가졌을 때 태교음악으로 들었다는 이유 하나 때문. 훗날에도 설거지를 할 때나 시장 가는 길에서 엄마는 자주 흥얼거렸고 오늘은 장성한 아들이 '초면'의 섹시녀를 껴안은 채 가사를 음미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밥딜런이란 가수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유이지 않을까.


"자기 계속 인상 쓰네. 내 싫나."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승진의 얼굴을 보며 섹시녀가 그의 목에 감고 있던 팔을 푼다. 아뿔싸.

잠시 차분해졌다고 고새 또 상념에 잠겼나 보다. 


"니 그거 아나. 인간은 진짜 진짜 좋을 때 얼굴이 찡그려진다 생각해 보래이. 그냥 맛있는 거 먹었을 때랑 억수 맛있는 거 먹었을 때 표정이 어떻노. 그냥 맛있는 건 아 요래 맛나네 정도지만 억수억수 맛난 거 먹을 땐 크으!! 이 표정 아이가?!"   


"그럼 자기는 지금 억수억수 좋은 거네? 인상을 박박쓰고 있잖아."


다시 팔을 감는 섹시녀를 보며 승진은 안도한다. 다행히 말 몇 마디로 넘겼지만 제발... 오늘이 마지막 파뤼라고! 일단 잊자. 우울하면 안 돼 억지로라도 웃는 거야 웃자라자짜 웃자짜! 제기랄 이따위 유행어가 머릿속에 왜 있는 걸까, 가뜩이나 복학생 뒷방 늙은이가 된 기분인데 더 우울해지잖아! 


다른 걸 찾아보자. 웃기게 생긴 상철이의 얼굴을 보면 나아질 거야.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대머리이기에 곧 대머리가 될 것이 자명한 상철이. 옆집에 사는 내 친구 상철이가 어젯밤 듬성듬성한 머리카락을 모아 샤기컷을 했다. 털 빠진 요크셔테리어 같은 상철이를 보면 웃음을 되찾을 수 있을 거야! 


자신에게 온전히 기대어 있는 섹시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곁눈질로 상철이를 찾는다. 큰 키 덕분에 웬만한 사물들이 내려다보이는 그의 시선으로 스테이지 이곳저곳을 훑지만 털 빠진 요크셔는 보이지 않는데...... 어라?


저건 뭐지?


대형스피커의 뒤쪽에서 꿈틀대는 그림자. 조명의 사각지대라 어둠에 가려져 흐릿하지만 분명 묘하게 꿈틀대고 있다. 나만 보이나? 주변을 훑어보지만 저 검은 실루엣에 집중하고 있는 건 자신밖에 없음에, 께름칙한 소름이 돋자 시선을 거두려는 찰나 무빙조명이 돌며 그쪽을 비춘다. 


"우와... 저게 뭐꼬..."


여실히 드러난 그것의 실체는 눈을 떼지 못할 만큼 독특하면서도 자체발광하는 태양처럼 홀로 오롯하다. 

귀엽게 말아 올린 똥머리에 솜털처럼 삐져나온 앞머리마저 러블리한. 이런 곳에 선 볼 수 없는 절정의 청순미와 함께 자신의 이상형에 완벽히 부합하는 저 캔디처럼 맑은 눈을 한 묘령의 소녀는 누구일까. 


도저히 눈을 떼지 못하겠다. 

마냥 예뻐서라기보다...

이상형이어서가 아니라... 


 졸라 웃겨. 


전봇대 위에서 겅중대다 감전된 원숭이 같기도 하고, 줄넘기를 잘하지 못하는 뚱땡이 초딩의 무모한 3단 뛰기 도전 같기도 한 저 춤사위... 도대체 Make you Feel My Love에 맞춰 저런 깝죽대는 댄스를 출 수 있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땀을 뻘뻘 흘리며 이제는 계단을 내려가는 마임까지 선보이자 승진은 허리를 꺾은채 웃음을 참지 못한다.


발작하듯 웃어젖히는 그를 향해 "또라이 아이가" 한마디를 남기고 떠난 섹시녀는 이제 안중에도 없다. 

오늘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그 웃음을 준 저 영혼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썰물에 빨려가듯 그녀를 향해 다가갈수록 그녀의 모습도 점차 또렷하고 진하게 보인다. 희고 얇은 다리에 잘 어울리는 짧은 치마, 그 각선미보다 더 눈길이 가는 건 수줍음에 자꾸만 치마를 내리는 그녀의 귀여운 손목과 더불어 전혀 야하지 않은 평범한 블라우스건만 글래머러스함 때문일까 시선을 회피하게 만드는 몸매. 이런 걸 큐티섹시라고 했던가. 

한 가지 흠이라면 어울리지 않은 헤드셋을 끼고 있단 정도? 


"행님 저분한테 꽂혔다! 맞죠!?"


웨이터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제임스가 나에게 형님이라 하는 건 상철이에게 받은 팁값을 하기 위해서 일터. 

그래... 제임스를 통한 자연스러운 접근으로 그녀를 유혹해 보자! 부킹만 10년 차인 베테랑의 깍듯한 손길을 빌어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는 거야! 때마침 다가오는 상철에게 승진은 헤드락 같은 어깨동무를 한다. 


"명령이다. 딱 20분만 룸에 들어오지 마래이! 싹 다!"

"와 그라는데!"

"신을 만났다. 여신." 



서둘러 룸으로 달려간 승진이 문을 파닥대며 담배연기를 빼낸다. 이윽고 일사불란하게 들어온 웨이터들이 너저분하게 깔려있던 안주와 빈병을 치우고 새로이 세팅한 맥주와 안주의 각을 맞춘 다음 향긋한 페브리즈까지 뿌리고 나서 줄줄이 사탕처럼 퇴장하면 홀로 커다란 룸에 다리를 꼬고 앉아 똥폼을 잡는 그. 

아차! 과일안주에 딸려 나온 파슬리를 꾹 짠 물 묻은 손으로 머리를 메 만지며 꽃단장까지 마친다.

 

똑. 똑.


나이스 타이밍, 제임스에게 손목이 잡혀 들어오는 그녀를 보자 승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미간을 찌푸린다. 


"오. 난 부킹 같은 거 싫어한다고 했는데."


단전에서 끌어낸 중저음에 말똥 한 눈으로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에서 뻑감이 느껴진다. 시작이 좋다. 


"그게 아이고 데려는 왔는데..."


순리대로라면 그녀를 내 옆에 앉힌 뒤 좋은시간되십쇼! 고정멘트와 함께 빠져줘야 하는 제임스이건만 밍기적밍기적 눈치를 보다 허리를 굽혀 귓속말을 거는 건 왜일까. 진하게 풍겨오는 땀냄새를 참으며 뜸 들이는 그를 조용히 채근한다.


"왜요."

"이상해..."

"뭐가요."


물음에 답도 않고 도망치는 제임스를 보며 이게 무슨 프로답지 않은 행동인가 싶으면서도 어쨌든 그녀와 단둘이 있게 됐으니 그는 팁값을 다했다. 지금부터 나만 잘하면 되는 거다. 

      

"저는 부킹을 싫어합니다. 작위적인 인간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제 성향과는 많이 달라서..."


멀뚱히 선 그녀에게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치지만 종종걸음으로 맞은편에 앉는 그녀를 보자 "허허 이거 매우 멋쩍구먼!"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도 포기를 모르는 남자 승진은 멀리 있는 맥주잔을 잡는 척 자연스럽게 옆으로 다가가 앉는 노련함을 보인다. 


"사실 오늘이 내 생일입니더. 방금 그쪽이 쓸쓸했던 나의 인생에 가장 큰 선물이 됐다고 해야 되나."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특유의 찡그림으로 시동을 건다. 말년 내내 연습했던 고독한 남자의 시그니쳐 포즈에 넘어가지 않은 여자는 없었다. 그녀 또한 지긋이 바라보며 관심을 갖는다........................ 관심을 갖는데.........


관심을 갖긴 하는데. 

이상하네. 


보고는 있는데 뻑간건 아니고 그렇다고 말을 거는 것도 아닌 그저 집중해서 보고만 있는 눈빛. 

말 그대로 아주 열심히 보고만 있는 그녀가 어색해져 승진은 찢어진 실눈을 씰룩이며 웃어버린다.


"와이리 뚫어져라 봅니꺼. 얼굴에 뭐 묻었어요?"


심하게 끄덕이는 그녀를 보자 아이쿠! 승진은 얼굴을 돌린 뒤 매만져본다. 눈곱이 꼈나? 순간 자신의 팔을 툭툭 치는 그녀를 향해 돌아보면 암행어사의 마패처럼 휴대폰을 들고 있는 그녀가 자신의 액정을 가리킨다. 


 -코털 삐져나왔어. 왼쪽.- 


그 속에 쓰인 글자를 더듬더듬 읽던 승진의 얼굴이 삽시간에 빨개진다. "아오 쪽팔리게..." 고개를 돌려 코털을 뽑은 뒤 아무렇지 않은 척 씩 웃지만 따가움에 고였던 눈물이 주룩 흘러내리자 그녀가 웃는다. 내가 민망할까 봐 소리 죽여 웃는 그녀의 배려까지도 너무나 사랑스럽다. 부끄럽긴 했지만 웃겼으니 됐다. 풀어진 틈을 타 엉덩이를 더 가까이 붙여본다. 


"이야 매너 좋네요? 내 쪽 싫어울까 봐 문자로 얘기해주구. 이런 거 어서 배웠어요? "

"......" 


10분처럼 느껴지는 10초...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10초 동안 승진은 관찰하듯 바라보는 그녀에게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이상함을 느낀 승진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휴대폰에 무어라 적은 뒤 액정을 가리키는데... 


-안 들려요. 말도 못 하고. 태어날 때부터.-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들의 나열. 이해를 강요하듯 그녀는 다시 한번 문자를 가리킨다.


-청각장애인입니다-


음, 아니야 침착해. 이건 너무 비현실적이잖아. 이건 그저 상철이와 친구들이 준비한 생일서프라이즈일 거야.

승진은 그녀가 들고 있는 휴대폰을 바라본다. 최신형 모토로라 레이저 핑크. 말도 못 하는 청각장애인이 최신형 전화기를 들고 다닌다? 그럴 수도 있지. 문자를 쓰거나 게임을 하고 싶거나 아니면 누구나 들고 다니니까 필요하든 필요 없든 갖고 싶은 마음정도야 십분 이해한다치고 그렇다면 그녀가 쓰고 있는 저 헤드셋. 작고 갸름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은 투박하고 커다란 블루투스 헤드셋은 뭘까. 앞뒤가 안 맞는 그녀를 보며 역시 멍청한 상철이가 준비한 어설픈 서프라이즈구나 확신이 선다. 


"저기요 그런 걸로 농담하면 벼락 맞아요 벼락." 


막을 틈도 없이 승진은 그녀가 쓰고 있던 헤드셋을 잽싸게 뽑아 든다. 글러먹은 서프라이즈에 대한 참 교육.


"안들린다카면서 내 말에 따박따박 대답도 다하고 이 뭐꼬 음악은 써라운드로 들으시나... 우왓!" 


똥머리를 푼 그녀가 머리카락으로 빠르게 가리긴 했지만 승진은 분명히 보았다. 뽀얗다 못해 투명한 그녀의 피부와는 달리 기괴한 흉터처럼 생긴 그녀의 이상한 귀를... 껌을 붙여놓은 것처럼 막혀버린 그곳을 수줍게 가리는 그녀를 보며 승진은 제임스의 경고를 떠올린다. 


"하여간에. 좀 이상해..."


프로의 경고를 무시한 대가로 나는 몸하나 숨길 수 없는 사막 위에서 태양 같은 그녀를 뜨겁고 따갑게 느끼고 있다. 1초. 10초. 30초... 이상하다.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걸까. 질끈 감고 있던 작은 눈이 번쩍 떠진다. 

내가 예상했던 아무 일은 무례함에 화가 나 분풀이를 한 뒤 뛰쳐나간다는 정도의 당연한 것이었음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상한 거고 또 궁금해진다. 지금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곁눈질로 슬쩍 쳐다보자마자 눈이 마주친다.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을까?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녀와 똑같이 관찰하듯 그녀를 바라본다.  

내가 아닌 어떤 인간에게도 조금의 적의조차 내비칠 것 같지 않는 따뜻한 눈빛. 

오히려 무척이나 설레고 재밌다는 '천진난만'의 반짝임까지 보이자 되려 화가 나는 건 나 자신이다. 

아까부터 나는 그녀가 화를 내고 뛰쳐나가길 바란 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더 상식적이고 당연한 태도니까.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서있는 나의 손에서 그녀는 헤드셋을 가져와 자신의 귀에 쏙 끼운다. 


눈을 찡긋하며 귀엽게 웃는 그녀를 보며 승진은 저 헤드셋이 귀를 가리는 용도였구나를 깨닫는다. 그리고 따져본다. 나이트클럽에서 청각장애인과 부킹이 될 확률은 몇 퍼센트일까. 왜 저 여자는 이곳에서 나를 곤경에 빠뜨리고 있는 걸까. 나는 그저 선량한... 선량한 양아치일 뿐인데... 은근슬쩍 반대편 맞은 자리로 옮겨 앉는 그에게 그녀는 또 무언가를 꺼내 보여준다. [청각장애 1급 강이레] 


이름과 사진을 보며 승진은 한번 더 따져본다. 나이트클럽에서 장애인등록증을 볼 확률은 또 몇 퍼센트일까... 


"어어 이. 이레구나! 진짜로 장애인 맞네!? 아니 말이 헛나왔다 미안. 장애인이지만 장애인이 아니라고. 너는.

사! 사진 잘 나왔다! 이뻐!"


말이 꼬인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실례되는 말이고 실례가 안 되는 말인지 모르겠다. 비지땀이 흐른다. 

도망치자... 자연스럽게 그녀를 내보낼 방법을 생각해 보는 거야 정신 차려! 집중! 

미간을 누르며 초집중의 자세를 취하려는데 물컹.

엉덩이와 허벅지가 닿을 만큼 바싹 다가앉는 그녀를 느끼자 심장이 내려앉는다. 


어이, 지금 내 팔꿈치가... 옆가슴에 닿은 것 같은데...?


청량하고 맑은 얼굴로 여우 같은 끼를 부리다니! 심히 당황스럽다.

나이트 죽돌이에 웬만한 끼쟁이가 와도 꿈쩍 않던 천하의 내가 왜... 

얼굴이 빨개지고 있을까.

  


2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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