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을 바탕으로 하는 뮤지컬은 많지 않다. 여러 이유가 짐작되지만, 소품이나 배경 등을 구현하는데 물질적인 어려움이 있을 것이고, 시대적 특징으로 인해 다룰 수 있는 내용의 한계점도 있고, 사극을 연기하는 것이 배우들에게 꽤나 도전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사극 드라마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서는 곧잘 연기하던 배우들도 사극에서는 한계점을 내보이는 경우가 종종 등장한다.
뮤지컬 <경종수정실록> 포스터 (출처 : 뮤지컬 <경종수정실록> 트위터 공식 계정)
그래서 <경종수정실록>이 궁금했다. 무대(특히 소극장!)에서 조선시대가 구현된다는 것이 신기했고, 현대극에서만 보던 배우들이 사극을 하는 것도 신기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경종이라는 소재 자체도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의 재위 기간이 짧았던 만큼 풀어낼 이야기가 많지 않고, 일반적으로 그의 이야기가 등장한다면 그의 부모(숙종과 장희빈)나 그의 동생(연잉군, 후의 영조)이 중심이 되는 작품에 곁다리처럼 끼어드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니까.
하지만 덥석 다녀오기에는 이 공연이 완전 초연이라는 점,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다행히 기회가 닿아 보러 다녀왔는데, 이 공연이 왜 인기가 있는지 동시에 왜 불호 후기가 많은지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더쿠 저격 포인트가 낭낭하지만, 공연의 퀄리티는 별로
우선 이 공연은 덕후 친화적이다. 연뮤덕들이 좋아하는 포인트가 공연 내적으로, 외적으로 산재해있다. 물론 '덕후 저격 포인트'라고 사전에 정의되어있는 것이 아닌 만큼, 사람들에 따라 다양한 생각이 있을 수 있다. 필자가 생각하는, 더쿠를 저격하는 포인트 중 가장 핵심적이고 영향력이 큰 (그리고 필자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인물들의 개인 서사, 그중에서도 관객들이 그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낄만한 사연이다. 경종은 자신의 아버지(숙종)가 자신의 어머니(장희빈)를 죽였다는 슬픈 과거가 있고, 세자로 있는 동안 세자 교체 위협에 계속 시달려야 했다. 연잉군(후의 영조)도 마찬가지. 경종과 형제관계임에도 정적 관계에 있었고 그의 어머니의 출신은 비천했다.(그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무수리 출신이다.) 가상인물인 홍수찬도 숙종이 그의 아버지를 죽인 것으로 묘사되어있다. 다시 말하자면 원수의 아들이 벗이자 모시는 군주인 것. 글로만 읽어도 어느 인물이든 간에 인생이 평탄할 리 없는 게 눈에 훤하지 않은가. 그러다 보니 인물들에게 동정심, 안타까움, 안쓰러움... 등과 같은 감정이 들 수밖에 없다.
뮤지컬 <경종수정실록> 페어사진. (출처 : 뮤지컬 <경종수정실록> 트위터 공식 계정)
그리고 이런 개인 서사가 서로와 엮이면서 파생되는 게 관계성이다. 요새 많이 이야기되는 표현으로는 브로맨스.(개인적으로 브로맨스라는 말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많이 쓰이니까.) 등장인물들이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가 특별하면 특별할수록 이야기도 살아나고 관객들이 등장인물을 이해하는데도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경종은 전형적으로 관계성을 강조하는 공연이다. 유약한 왕과 그런 왕을 지키는 오랜 벗, 그리고 왕과 정적 관계이지만 형제관계이기도 한 왕세제. 왕과 벗을, 벗과 왕세제를, 왕세제와 왕으로 짝 지을 수 있는데 어느 짝이든 아주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고, 공연의 내용에서도 이런 포인트를 놓치지 않는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공연 내용의 한 80%은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짧게 하나 더, 배우에 따라 다양한 노선이 가능한 것도 '회전러'(하나의 공연을 여러 번 보는 사람)의 취향을 저격한다.
공연 외적으로 좋은 점은 각종 혜택들이다. 일단 재관람 혜택이 어마어마하다. 소극장 공연에서는 보통 재관람 혜택이 있고, 재관람 도장을 9개나 10개를 찍으면 동그란 것(CD)나 포토북 등을 증정한다. 그런데 이 공연에선 도장 5개를 완성하면 포토북, 실황 OST, 실황 영상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ㅇㅁㅇ(!!!) 그리고 각종 증정 이벤트(포토카드, 장갑, 할인권 등)도 있다. 사실 공연을 보고 나면 손에 남는 건 별로 없다. 프로그램북이나 포토북, 프레스콜 영상 정도? 특히 프레스콜 영상이 없다면 좋아하는 캐릭터가 움직이는(...) 모습을 볼 방법이 마땅히 없다. 게다가 증정품은 공연을 보는 이들에게만 주어지니까 특별하기까지(!) 그래서 이렇게 무언가를 혜자하게 주는 공연에 덕후들의 마음은 녹아내릴 수밖에 없다.
뮤지컬 <경종수정실록> 이벤트 (출처 : 뮤지컬 <경종수정실록> 트위터 공식 계정)
자, 여기까지는 공연을 보면서 느꼈던 좋았던 점이었다. 지금부터는 공연의 퀄리티에 의문을 표했던 이유를 얘기해보려고 한다. 점수를 매기자면 별 두 개 정도 주고 싶을 정도로, 솔직히 내용, 넘버, 연출, 배우들의 연기 다 별로였다.
일단 내용부터 얘기해보자. 경종과 연잉군 사이의 갈등이나 정치적인 상황을 이야기하는 건 괜찮았다. 공연이 끝난 후 찾아보니 대사나 사건이 역사적 기록에 근거한 경우도 많았고. 경종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내용이 등장해서 더 흥미롭기도 했다. 그런데 후반부 장면이 앞에서 전개된 내용과 연결이 잘 되지 않는다. 특히 연잉군에게 경종이 말하는 대사, ‘나에게 백성은 너였다’ 이후부터는 보면서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경종이 앞에서 보여준 연잉군에 대한 애정과 경종의 마지막 선택에 근거를 더해주기 위해 저런 대사를 넣고 경종이 연잉군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구구절절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저 대사가 등장하면서 앞에서 백성을 위해 힘쓰고 싶어 했던 경종의 모습이 알고 보면 사실 연잉군을 위함이었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다시 말해서 저 대사 하나로 머릿속에 이해되고 있던 공연 내용이 뒤죽박죽 되어버린다. 백성과 연잉군을 엮지 말고 다른 이야기로 경종의 이런 마음을 표현하면 차라리 나았을 수도.
뮤지컬 <경종수정실록> 공연사진 (출처 : 뮤지컬 <경종수정실록> 트위터 공식 계정)
게다가 결말 자체도 갑작스럽다. 필자가 느끼기에 사화를 통해서 경종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낼 수 있는 바탕이 만들어진 것 같았는데, 그는 갑자기 연잉군에게 모든 걸 넘기고 떠난다. 하지만 이럴 이유가 앞에서 충분하게 제시되지 않으니 당황스러울 뿐이다. 홍수찬의 결말이나 자신이 변해가는 모습에 대한 회의감 정도가 떠오르지만 좀 더 떡밥을 던져놨어야 하지 않나. 그리고 경종과 연잉군의 급 화해까지. 앞에서 엄청 싸워놓고 갑자기 내용이 후루루룩 바뀌어서 머릿속에 또다시 물음표가 가득했다.
그리고 넘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기타가 3인조 라이브 밴드 안에 들어가 있는 건 좋았다. 경종이 꿈과 현실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과 기타 소리의 몽환적임(음알못이라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이잉- 소리가 나는데 그게 굉장히 잘 어울렸다.)이 연결되어서 좋았고, 전형적이지 않아서 좋았다. 하지만… 많은 넘버들이 강약 조절이 없고 다 막판에 지르는 것에 집중한다. 마치 우리 배우들이 이렇게 노래를 잘합니다!@!@!! 자랑하듯이. 이러니 기억 속에 남는 넘버도 별로 없을 수밖에. 넘버들이 비슷비슷하다 보니까, 들으면서 좋았던 넘버들도 이런 문제 때문에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뮤지컬 <경종수정실록> 무대 사진 (출처 : 뮤지컬 <경종수정실록> 트위터 공식 계정)
연출은 음… 필자가 보기에 그냥 아무것도 안 한 느낌이 들었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사실 보는 측면에 따라 다를 수 있긴 한데, 연출이 많이 터치하지 않으면 배우들의 표현 폭이 넓어진다. 경종도 배우의 해석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는 내용이라, 이런 점에선 연출의 공백이 좋았다. 하지만 열린 연출과 아무것도 안 한 연출은 다르다. 공연이 끝나고 연출과 관련해서 기억에 남는 게 하나도 없다. 조명 색깔이 여러 번 바뀌긴 했네.
특히 연출이 아무것도 안 했다, 고 느끼게 된 데는 초반에 칼싸움하는 장면의 영향이 컸다. 칼싸움이 정말 너무 어설프다. 아기들 칼싸움같이 느껴질 정도.(음... 아기들 칼싸움이 더 스릴 있을지도 모르겠다.) 연습이 조금 더 해서 합을 맞춰 박진감이 넘치게 하든가, 혹은 많은 연습이 불가능한 상태라면 연출이 다른 방향으로 해석해서 칼싸움을 표현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조심스럽지만 배우에 대한 후기를 남기려 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사극 드라마는 배우들의 연기력을 냉정하게 보여주는데, 뮤지컬 <경종수정실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개인적으로 내가 보러 간 날 연잉군 역을 맡았던 배우는 다른 공연에서는 좋은 평을 들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필자가 직접 본 적은 없다. 이번이 처음.) 경종에서는 톤이 너무 어색했다. 카리스마 있는 연잉군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리고 극 중에서 등장하는 어렸을 때의 연잉군과 차별점을 두고 싶어서, 일부러 목소리와 말투를 다르게 내는 것 같은데 이게 마치 껄렁거리는 혹은 입 안에 뭐 하나 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들렸다. 그리고 홍수찬역의 배우도 비슷했는데, 사극이라기엔 어색한 어미나 말투, 자세들이 눈에 띄었다. (혹시나 해서 덧붙인다. 이 글에 첨부된 사진은 내가 공연에서 봤던 배우를 특정해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공식 계정에서 글의 흐름에 적합한 사진들을 가져온 것이다.)
더쿠들에게도, 공연의 퀄리티는 중요하다
뮤지컬 <경종수정실록>이 덕후들에게 왜 사랑받는지 잘 알겠고 필자도 그런 부분은 참 좋았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 덕후들에게도 공연의 퀄리티는 중요하다. 이를 여러 공연(특히 소극장 공연)에서 많이 간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공연이 아무리 덕후 저격 포인트가 많다 하더라도 공연이 별로면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 시간과 돈을 들여서 보는데 이왕 보는 거 '질 좋은' 공연에 이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아무리 내외적으로 장점이 있다 하더라도 공연의 퀄리티 자체가 별로라는 치명적 단점을 개선하지 않는다면, 뮤지컬 <경종수정실록>이 오래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