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가 내게 전해준 답
(※ 글의 특성상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좋은 공연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정해진 답은 없다. 공연을 보는 기준은 모두 다르니까. 내 머릿속에 이 질문이, 그리고 답이 떠오른 건 얼마 전 뮤지컬 <Story of My life>(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이하 솜)을 보고 나온 뒤였다. 좋은 공연이라는 건, 좋은 작품이라는 건 솜이 그러한 거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든 이유는 5년 전 처음으로 솜을 봤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5년 전의 나는 공연을 보고 극성 앨빈맘이 되었다. 앨빈을 떠나고 고향에 남겨진 그를 외면했던 톰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3년 전, 두 번째 보러 갔을 때는 오로지 앨빈만 봤다. 공연이 톰의 시선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공연에서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앨빈의 감정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힌트를 얻고 싶었다. 그리고 그 힌트를 통해 앨빈이 왜 다리 위에서 뛰어내렸는지 그 답을 찾고 싶었다.
시간이 꽤 흘러 지난주 공연을 다시 보러 갔을 때 당연히 이번에도 앨빈만이 눈에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다. 위의 이유도 있었고, 이번에 공연을 예매했던 이유도 특정 배우의 앨빈이 보고 싶어서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공연이 시작되고 들어온 톰의 모습이, 톰에게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아버렸다.
물론, 여기서 절대, 그 날 공연의 앨빈 역을 한 배우가 별로여서 그랬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앨빈도 정말 좋았다. 앨빈이 톰을 천사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앨빈이 톰에게 천사였다는 걸 너무나 명확히 잘 보여주는 앨빈이었다.) 내가 톰에게 시선을 빼앗긴 이유는 톰의 상황에 내가 몰입해서였다. 5년 전의 나는 고향에서 서울로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사회초년생이었다. 서울로 올라오기 전 고향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많은 친구들이 서울로 떠났고 나는 ‘남겨졌다’는 기분을 느꼈다. 친구들의 세상과 나의 세상이 달라지는 걸 느끼면서 허탈함, 허무함, 외로움, 불안함 등 다양한 감정을 겪었다. 서울로 올라오게 된 이후에도 그때의 감정은 기억 속에 남아있었고 나는 솜을 보면서 앨빈에게 몰입했다. 톰을 떠나보내고 고향에 남겨진 앨빈의 모습이 과거의 나 같았기 때문에.
하지만 올해의 나는 더 이상 5년 전의 나가 아니었다. 서울에 올라와 정신없이 매일매일을 보내면서 과거에 느꼈던 감정들은 어느새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제는 나의 슬픔을 겪고, 주위의 슬픔을 목격하면서 완전히 떠나버린 이들을 추억하는 사람의 감정을 알고 있었다. 가끔은 떠난 이가 원망스럽기도 했다가, 그를 그렇게 떠나보내도록 내버려 둔 내가 밉기도 했다가. 이 감정을 톰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공연을 보면서, 앨빈이 얼마나 환상적 존재인지 그리고 톰이 얼마나 평범한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떠나 버린 엄마를 기억하기 위해 중/고등학생이 되어서까지 엄마의 샤워가운을 할로윈 파티에 입고, 짜부시켜버려도 되는 벌레 한 마리일 수도 있는 나비의 힘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어릴 때는 앨빈처럼 순수했지만 점차 커가면서 철이 드는 게 오히려 평범하고 일반적인 ‘인생의 이야기’ 일 것이다. 그리고 톰이 ‘다들 어릴 적 친구는 있잖아요!’라고 외치듯이, 어릴 때 친했던 친구가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길 반복하다 보니 이별에 익숙해진 사람. 그게 지금의 나였다.
톰은 작은 틈새를 찾고자 한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어버리도록 만든 작은 틈새. 생긴지도 몰랐던 틈새는 외면과 방치 속에 점점 커지고 결국 두 사람의 이별에까지 이른다. 과거의 나는 이 틈새를 만든 게 톰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과연 톰이 유난히 나쁜 사람이라서 틈새를 만든 걸까? 아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분명히 이런 틈새를 만들었을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가 나와의 관계에서 만들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꽤나 자주 이 틈새를 눈치채지 못하거나 혹은 외면하고, 그렇게 방치 속에 틈새는 벌어져 돌이킬 수 없게 되기도 했을 것이다.
이렇게 구구절절 과거의 감정과 현재의 감정을 늘어놓는 이유는 첫 문단의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다. 좋은 공연이란 무엇일까? 나는 좋은 공연이라면 공연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을 두루 볼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캐릭터도 단순히 인원수를 채우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을 이해시킬 수 있을 만큼의 서사를 가지고 있으며 공연의 내용이 전개되는 데 필요한 인물이어야 한다. 더 나아가, 공연을 볼 때마다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다면 더욱 좋은 공연이라고 생각한다.(물론 좋은 의미에서. 이 때는 별로고 저 때는 좋으면 그건 그냥 일관성이 없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A라는 공연을 보면 B라는 감정이 느껴진다'가 고정되어 있으면 공연을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사라지므로 공연을 보는 재미가 떨어지는 걸 느끼는 편이다.
하지만 솜은 앨빈에게도 톰에게도 서사에 있어서 정성을 쏟고 있고, 이는 앨빈과 톰을 모두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고 더 나아가 공연을 볼 때마다 새로운 감정이 느껴지도록 만든다. 언뜻 봤을 때 앨빈과 톰이 서로 대립되는 위치에 있는 것처럼 혹은 톰이 '악'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어떤 날엔 앨빈을, 어떤 날엔 톰을 이해하게 되는 건 분명히 내용의 힘 덕분이다. 물론 톰이 저지른 짓이 분명히 나쁜 짓이긴 하기 때문에(…) 앨빈에게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이야기를 곱씹어보면 볼수록 서서히 톰도 이해하게 된다.
한 가지 옥에 티가 있다면 4년 전이나, 3년 전이나, 올해나 공연의 연출이나 무대의 구성 등이 비슷비슷하다는 것이다. 여기다가 굳이 의미를 붙이자면 솜이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고 변한 사람이 변하지 않았던 사람을 기억하는 내용이니까, 연출이나 무대 구성이 변하지 않는 게 공연의 의미를 더 살리는 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너무(…) 오래됐다. 배우들의 ‘노선’ 차이나 위에서 말한 인물들의 서사로 다른 느낌을 주지만 여기에만 의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며 배우들의 여러 해석을 가능케하는데는 연출이나 무대의 힘도 분명히 필요하다. 언제까지 이런 연출과 무대가 '질리지 않고' 좋게 느껴질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솜은 내게 '좋은 공연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과 같은 공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