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빛날 수 있는 공연을 퇴색시켜버린 외부적 요인들
※ 글의 특성상 뮤지컬 <팬레터>의 스포일러가 아주 가득 담겨있습니다(!)
뮤지컬 <팬레터>가 최근 소극장에서 올라온 공연들 중 가장 사랑받는 공연이라는 건 많은 이들이 부정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지금 공연 예매창을 들어가도 1층은 거의 대부분 팔렸고, 안 좋기로 유명한 연강홀 2층임에도 불구하고 2층 앞 열은 많이 예매되어있는 상태다. 그러나 내게는 <팬레터>가 상당히 애매한 존재였다. 마냥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그렇다고 싫어한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2016년 초연 때 <팬레터>는 불호였지만, 2017년 재연 때 <팬레터>는 특정 배우의 ‘노선’이 나를 설득시켰던 덕분에 호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팬레터>가 다시 온다고 했을 때도 별 감정은 없었다. 그 배우가 안 오기도 했고, 소극장 뮤지컬(중극장에 가깝긴 하지만, 아무튼.)인 것에 비해 지나치게 비싸진 가격 때문이기도 했고. 그래도 한 번쯤은 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얼마 전 공연을 보고 왔고, … 분노로 이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 분노의 이유는 복합적이지만, 공연의 퀄리티/바뀐 연출과 내용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우선 공연의 퀄리티. <팬레터>가 막을 열고 가장 먼저 나온 비판은 음향이 최악이라는 것이었다. 음향알못인 나에게도 그럴까, 생각하고 갔지만 세상에. 정말 최악이었다. 마치, 과장을 보태자면 조금 고급진 노래방에서 듣는 느낌? 라이브가 아니고 MR인 것 까지야 이해할 수 있는데. MR에서 싼 값에 녹음했다는 게 너무 느껴진다. 게다가 음향이 배우들의 성량을 감당할 만큼 튼튼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탓에 배우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부르지 못하고, 화음이 불협화음이 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게다가, 여러 명의 배우들이 함께 부르는 넘버에서 마지막에는 한 배우만 고음+큰 성량으로 부르는 부분이 있는데 그때 웅웅 울리는 소리가 들리기까지. '뮤지컬'인데 음향 때문에 노래를 듣고 인상을 여러 번 찌푸리게 된다면, 이건 제작사의 직무유기가 아닐까.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배우의 실수에 굉장히 민감한 편이다. 뭐, 물론 사람이 하는 거니까 한번 정도의 대사 실수야 이해할 수 있다. 뭘 떨어뜨린다거나, 그런 것도 공연을 보는 관객들이 무난하게 넘어갈 정도의 실수라면 상관없다. 금방 다시 주우면 되니까. 하지만 그날 보러 갔을 때 여러 번의 대사 실수를 듣고, 여러 명의 배우가 동시에 노래를 부를 때 혼자 음을 잘못 맞춰 화음이 불협화음이 되게 만드는 걸 보고 있자니… 내가 왜 여기에 앉아있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로는, 바뀐 내용. 먼저 칠인회 이야기부터 해보자. 칠인회의 실제 모티프가 된 단체는 구인회인데, 아주 단순하고 쉽게 말하자면 구인회는 모더니즘과 순수예술을 지향했던 단체다. 따라서 공연 속 칠인회도 마찬가지인데, 이번에 바뀐 대사들은 이를 관객들에게 설명해주려 아주아주 애를 쓴다. 그러나 초연, 재연에서 인물들의 몇몇 대사를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난 후 찾아보는 재미도 있었고. 근데 이걸 굳이 굳이 풀어서 관객들에게 떠먹여 주려 하니 그 부분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정성 들여서 설명했는데 2막에선 칠인회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왜? 사실 팬레터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건 김해진과 정세훈의 관계니까. 공들여서 쌓아놓은 서사를 써먹을 곳도 많지 않은데, 왜 애써 쌓아 놓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칠인회 내용이 늘어난 건 이해할 수 있다. 김해진이 문학적 성과를 이룩하기 위해 히카루에게 미쳐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납득시키는 데 일조하기도 하고, 공연의 내용이 김해진과 정세훈 위주로 돌아가다 보니 큰 비중을 가지지 못하는 칠인회 캐릭터가 아깝기도 하니까. 하지만 정세훈이 히카루다, 하고 계속 떠먹여 주는 건 정말 눈뜨고 못 봐줄 일이었다. 이 정도면 김해진과 칠인회가 정세훈이 히카루라는 것을 모르는 게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다. 이전에는 정세훈이 히카루로서의 모습을 얼마나 드러내는지가 배우의 노선에 따라 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히카루 같지 않은 것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바로 앞에서, (히카루랑) 만나시면 안 돼요 하는데 그걸 어떻게 모르나.
마지막으로 내용적으로 아쉬운 건, 히카루다. 이전까지 히카루의 존재는 아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었다. 누군가는 세훈의 욕망이라고도, 누군가는 세훈의 또 다른 인격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리고 히카루가 '악몽'으로 변해가는 이유가 세훈을 위해서라고도, 혹은 자신을 위해서라고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이런 다양한 해석 같은 건 불가능하다. 초반부터 악의가 뿜뿜하는 히카루를 보고 그 누가 히카루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겠는가.
개인적으로 마음이 아주 불편하게 만드는 부분은 여기서 기인한다. 초연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재연부터 이러했던 것 같은데, 히카루가 처음에는 '남자'처럼 바지를, 중간에는 치마를, 후반부에는 몸에 딱 달라붙는 원피스를 입고 나온다. 일단 세훈의 욕망이든 세훈의 인격이든 히카루가 세훈으로부터 시작되는 건 동일한데, 세훈이 아무리 생물적으로 남자라고 해도 히카루가 처음에 꼭 '남성'의 모습을 해야 하는 걸까? 다른 뮤지컬에서는 한 사람의 두 인격을 여성과 남성으로 캐스팅한 적도 있는데 말이다. (타 뮤지컬 강 스포(!)) 더 최악인 건, 2막에서 히카루가 몸에 딱 달라붙는 옷을 입고 치명치명한 머리를 하고 나온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빌런으로서의 여성 이미지를 이토록 적나라하게 표현하다니. 심지어 지난 시즌에는 그래도 히카루가 여러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다른 부분에서라도 주었기 때문에 이런 옷과 머리가 그나마 '덜' 불편했지만, 이번 시즌이 그리는 히카루의 이미지가 악당으로 고정되어버렸기 때문에 2막에서 히카루의 옷이 더 전형적으로 느껴지게 되었다.
한 줄로 요약하자면, 그냥 모든 게 아쉽다. 공연이 더 반짝반짝 빛날 수 있었다. 넘버도 좋고, 배우들도 다들 역할에 잘 어울리고, 여러 방면으로 다양하게 이야기될 수 있는 작품인데 그걸 살리지 못한 게 아쉽다. 그리고 그게 외부적 요인에서 기인했다는 것이 더.